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20)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4. 각 분야의 명신(名臣)들

 

▶ 문무겸전의 청렴 강직한 관리 조빈(曹彬)

 

조빈은 강직한 청백리로 글 읽기를 좋아한 문무겸전의 무장이었다.
그는 품성이 바르며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조광윤과 풍채나 성격 면에서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후당 때인 931년(명종6)에 태어나 조광윤보다 네 살이 적다.
조빈의 누나가 후주 태조 곽위의 황후가 되면서 그는 황실의 외척이 되었다. 세종 때 그는 공봉관(供奉官)이 되어 황제의 음식, 다과, 술 등을 관리했다.
당시 장군으로 있던 조광윤은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조빈을 찾아가서 술을 얻어 마셨다.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매번 조빈이 제공해 준 술은 모두 그가 시장에 가서 자신의 돈으로 사온 술이었다. 장군 조광윤은 조빈에게 물었다.
「당신이 술을 관리했기에 당신에게 좀 얻어 마시려 간 것인데 왜 시장에 가서 사다 주었소?」
조빈이 말했다.
「저는 술을 관리하는 관리인데 어떻게 사사로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조광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는 등극한 후 신하들과 후주 세종의 옛 신하들에 대해 언급할 때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주인을 배신하지 않을 자는 조빈뿐이오.」

 

조빈은 절대로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거나 빌붙지 않았다. 조광윤이 전전도점검이 되었을 때 후주 관리들은 그와 사귀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조빈에게 호감을 가진 조광윤은 이 정직한 공봉관과 사귀려 했으나, 재물에 대한 욕심도 없거니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지도 않는 조빈은 조광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조정관리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의 호의를 외면하고 빌붙으려고 하지 않았다.
조광윤이 금군통솔자로 승진된 후 조빈은 오히려 그와의 왕래를 자제했고 공적인 일이 없으면 절대 그의 집을 찾지 않았으며 그가 초청한 연회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이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으나 여전히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조빈을 객성사(客省使) 객성사(客省使): 외국 사절(使節)이나 지방 제후(諸侯)들이 조정에 왔을 때 이에 필요한 행사를 준비하는 일종의 의전관(儀典官)에 임명했다.
어느 날, 그가 조빈과 지난 일을 이야기하다가 물었다.
「짐(朕)이 후주의 장군으로 있을 때 조정 관원들 중에서 제일 사귀고 싶었던 사람이 경(卿)이었는데 왜 일부러 나를 멀리했소?」
조빈은 구실을 찾아 대답했다.
「신(臣)은 후주황실의 근친으로서 내직을 맡고 있었으니, 어찌 감히 마음대로 사람들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
이에 조광윤이 웃으며 말했다.
「세종이 즉위한 후 경(卿)은 황실의 근친이라 할 수 없었지 않소?」
조빈은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비록 황실의 근친은 아니지만, 다 같이 한 조정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구태여 따로 사귈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빈의 강직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공적인 일에 사사로운 감정이 생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또 조광윤이 황제가 되었다 해서 비굴하지 않았다.
조빈이 일관성 있게 직무에 충실하고 신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조광윤은 어느 날 특별히 그를 불러 인재를 추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일부 군정 관리들에 대한 의견을 구하려 했다. 조빈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저를 장군으로 임명하셨으니 저는 싸우는 것 밖에 모릅니다. 인재를 추천하는 것은 재상들이 할일이며 신(臣)이 마음대로 폐하께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월권행위입니다.」
송태조 조광윤이 말했다.
「경(卿)이 한 사람이라도 추천해 보시오. 짐(朕)과 같은 생각인지 보려고 그러오.」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렵게 되어서야 조빈은 말했다.
「전운사(轉運使) 심륜은 군(軍)을 따라 후촉에 갔을 때도 혼자 소사(蔬食)했습니다. 돌아올 때 그의 수레에는 책만 몇 권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청렴한 관리이지요.」
조광윤은 크게 기뻐하여 심륜을 추밀부사(樞密副使)에 특별히 임명했다.

 

절개가 곧고 자만하지 않는 것은 조빈의 또 하나의 미덕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남당을 평정한 후 조정에 돌아와 조광윤을 만났을 때 그는 전쟁의 공로와 고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만 “황제의 명을 받고 강남에 갔다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라고 몇 줄 적은 상소만 올렸다. 큰 나라를 평정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도 그저 한마디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라고 보고한 조빈은 진정한 군자라고 할 수 있다.

 

▶ 남한(南漢)을 평정한 대장군 반미(潘美)

 

반미는 후당 장종 때인 925년에 태어났으며 조광윤보다는 두 살 위이다. 그는 후주의 객성사(客省使)로 있을 때 조광윤과 처음으로 가까워졌다. 진교병변 때 그는 변함없이 조광윤을 지지했고 먼저 경성으로 달려가 집정대신을 만나 병변사실을 알리는 공을 세웠다.

 

형남과 호남을 통일한 송태조는 반미를 담주(潭州)방어사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그는 문관에서 무관으로 변신하였다.
그는 송태조의 통일대업을 이루는데 많은 공을 세우고 주동적으로 많은 일들을 처리함으로써 조광윤의 칭찬을 받았다. 담주는 남한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조광윤의 승낙도 없이 군을 이끌고 남한의 침주(郴州)를 공략하고 관리들을 사살했지만, 조광윤은 그 죄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반미는 남한의 내상시(內常侍) 소정현(邵廷琄)이 남한정벌의 걸림돌이 되자 이간계(離間計)를 써서 남한왕 유창으로 하여금 그를 죽이도록 했다.
970년(태조11) 9월 조광윤이 반미에게 남한을 전면 공격하도록 명하자, 벼르고 있던 그는 하주(賀州)와 소주(韶州)로 파죽지세로 돌진했다.
그때 코끼리를 동원하여 대응하던 남한군을 격파하고 소주(韶州를 점령했다. 이어서 도성인 광주성(廣州城)을 함락함으로써, 남한을 평정했다.
그 후 반미는 남한의 사회상(社會相)을 상세히 조사하고 남한왕이 백성에게 가져다 준 고통에 대해 실사하여 조정에 상황을 여실히 보고함으로써, 송태조가 백성에게 이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크게 기여했다.
후일 조광윤은 남당을 통일할 때도 반미를 부장(副將)으로 임명해 통솔자 조빈과 한 팀이 되어 남당을 평정하는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했다.

 

이른바 열사의 만년은 처량하다고 했던가? 송태조 조광윤이 타계한 후 반미는 여전히 군사요직에 있었다. 마음은 여전히 웅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으나 예전만큼 예기가 왕성하지 못했다.
그는 태종 때 주장(主將)을 맡아 거란을 공격했으나, 부장(副將) 양계업(楊繼業)이 전장에서 죽는 바람에 전쟁에 패하여 북방 국경이 위태롭게 되었다.
후일 또 양계업의 처 사태군(佘太君)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강직처분까지 받게 되었다. 백성들 사이에는 ‘반양(潘楊)’의 소송안이 널리 전파되었다.
어쨌든 양계업은 나라를 위해 희생되었고 반미는 그로 인해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극중 충돌요소에 의해 소설이나 희극에서 반미는 어둡고 추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개봉(開封) 용정 앞에 있는 두개 호수의 이름을 하나는 얕고 탁하다 하여 ‘반가호(潘家湖)’라 부르고, 하나는 깊고 맑다 하여 ‘양가호(楊家湖)’라 부르고 있다. 반미는 남한, 남당, 북한을 멸망시킨 대장군으로 송나라의 통일대업을 위해 위대한 기여를 한 충신이다. 양계업의 죽음에 의해 간신배로 전해진 것은 문인들에 의해 잘못 그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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