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공산당 가입의 이념 논쟁

홍 장군, 50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된 독립군 재판 위원으로 참가

 

 

(시사1 = 윤여진 기자)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의 육군사관학교(육사) 내 흉상을 철거하기 위해 홍 장군에 대한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 없시 자유시 참변과 공산당 가입 등을 문제 삼으며 이념 공세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는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통해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고, 소련 공산당에 가담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력이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흉상 철거에 대한 명분을 내세웠다.

 

국방부가 밝힌 자유시 참변과 홍범도 해당 자료에서는 "홍범도 잔군이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91년 한·소 수교 직후 발굴한 소련 측 정부문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일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다'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어 "홍범도 장군은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한인대표 52명의 일원으로 참석했다"며 "동년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상금, 친필서명된 '조선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했다"고 부연했다.

 

국방부는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 뿐만 아니라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을 김일성 주석과 스탈린 정권이 한반도에 일으킨 전쟁과도 연결지었다. 이 같은 주장은 1920년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그러면서 "자유시 참변사태는 1921년 6월에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며,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한에 섰다는 평가"라고 설명했다.

 

또 "이 때 독립군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다"며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자유시 참변에서 사망한 독립군에 대한 숫자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국방부는 사망자를 600면까지 보고 있다고 밝혔지만, 국방부 국사편찬위원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는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로 사망자가 36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중 사망 및 익사, 행방불명 인원이 총 600여명으로 나타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국방부 건물 앞에 있는 흉상에는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1907년 11월 포병 부대를 조직하여 삼수, 갑산 일대에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고, 1919년 대한독립군을 창설하여 두만강 연안으로 계속적인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또 "1920년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다"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21년 8월에 추가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어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유해를 봉환받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