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따뜻한 인간 조광윤(17)

제4절 ‘황제의 남자들’: ‘인간관계의 마법사’ 조광윤

이때부터 그는 다시 조광윤의 통일대업과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책사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조광윤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경우 먼저 그에게 자문을 구함으로써 특별한 군신관계임을 보여 주었다.
어느 때인가 송태조 조광윤은 조보에게 이렇게 물었다.
「천하는 당말(唐末) 이래 전쟁이 그치지 않았소. 이제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위한 백년대계를 도모하려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소?」
이에 조보가 아뢰었다.
「폐하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하늘과 땅, 인간과 신(神)에게 다 축복이 될 것이옵니다. 옛부터 번진(藩鎭)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천하가 항상 불안정했습니다. 이제라도 절도사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식량과 금전적 규제를 가하며 그들의 정예군을 철수시킨다면 천하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광윤과 조보의 이번 대화는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대화 같았지만 사실상은 그 유명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는 치국 명책(名策)이 바로 이 대화에서 결정된 것이다.

 

송태조가 등극한 지 거의 3년이 다 되어갈 무렵, 962년(태조3) 10월에 조보는 검교태보(檢校太保), 추밀사로 승진되어 재상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중신이 되었다.
조광윤이 중앙기구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추밀원이 군권을 장악하게 했기 때문에 추밀사가 된 조보는 조광윤을 대신해 막강한 병권을 행사하게 된 셈이었다.
추밀사가 되어 명분이 있게 된 조보는 군사관련 문제에 대해 과감히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태조4) 조광의의 장인 천웅군절도사 부언경이 황제를 알현하러 조정에 왔을 때의 일이다. 조광윤은 그가 용맹하고 용병술이 뛰어난 장수이며, 동생의 장인일 뿐 아니라 후주 세종의 장인이었던 한 점을 고려해 금군을 통솔케 하려고 임명장을 작성해 추밀사 조보에게 전했다.
임명장을 접수한 조보는 조광윤의 결정에 대해 반대했다.
이미 전 왕조 때부터 많은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 부언경에게 다시 병권을 위임하는 것은 바로 ‘절도사의 권력을 축소하는 책략’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그는 조광윤의 임명장을 눌러놓고 간언을 올렸다.
「폐하께서 절도사에게 병권을 위임하는 것은 득실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신 결정이오니 폐하께서 이 명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조광윤이 말했다.
「경(卿)이 부언경을 의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그만큼 잘해줬는데 감히 짐(朕)을 배신하기라도 한단 말이오?」
설득이 먹히지 않자 조보는 감히 황제에게 무례한 말을 한마디 골라 톡 쏘아붙였다.
「후주 세종도 폐하께 그토록 잘해 주셨는데 어떻습니까? 폐하도 의리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여 절도사 부언경의 전전도점검 임명 건은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백년대계를 위해 절도사의 권력을 축소하고 금군 고위장군들의 병권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절도사에게 다시 금군의 통솔권을 부여하는 것은 실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심이 없고 충직한 조보는 황제의 미움을 살지언정 과감히 간언하고 잘못된 것은 시정하려 했다.

 

964년(태조5) 1월, 조광윤은 범질, 왕부, 위인포 등 3명의 재상을 해임하고, 조보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로부터 조보는 진정한 송나라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대신이 되었다. 조보는 재상이 되자마자 조광윤에게 상소문을 올려 문무백관에 대해 고과평정(考課評定)을 할 것을 요구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현명한 자를 임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현명한 자를 임용한 후에는 일 처리를 완벽하게 하도록 하고 실적을 쌓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관리들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상이 된 후 그가 실시한 첫 시정(施政)방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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