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왕으로서 송태조 조광윤은 처세를 잘했고 또한 필요한 인재를 잘 기용했다.
이것은 흔치 않은 일로서 영명한 정치가들의 공통된 점이다. 처세와 인재의 기용, 그리고 권력학(權力學)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처세를 잘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자는 곧 사람을 잘 쓸 줄 알고 권력을 이용할 줄 알므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조광윤의 처세와 사람을 쓰는 비결은 다름 아닌 ‘솔직 담백한 점’이었다. 조광윤의 성격에 대하여는 여러 역사 기록과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의 성격을 대략 종합해 보면, 총명하고 성품이 호방하고 활달했고(聰明豁達), 무예의 절정고수로서 명쾌한 결단력을 지녔으며(神武英斷), 인품이 너그러워 많은 이를 용서했고(寬仁多恕), 부모에게 효심이 깊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으며(孝心友愛),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嗜酒私訪).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조광윤의 막부에는 자연히 현능한 인재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치밀하게 작전계획을 짜는 지략가 조보와 가시덤불을 헤쳐 선봉에서 돌진하는 유희고가 있었고, 선동을 잘하는 초소보가 있는가 하면, 재물관리를 잘하는 심륜이 있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자신의 막부에 현능한 자들을 불러들일 때 결코 전국(戰國)시기의 맹상군(孟嘗君)처럼 어중이떠중이까지 등용하지 않았다.
그는 실속 있는 학식과 실력을 갖추고 일처리에 유능한 자들을 벗으로 삼아 직책 범위 내에서 그의 업무를 돕도록 했다.
조광윤이 막부에 이들을 모은 것은 결코 후일 황제에 등극했을 때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광윤막부의 참모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추천한 사람들이며, 세상을 떠난 유사(劉詞) 같은 대신들의 막부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장군시절 조광윤은 단지 싸울 줄만 아는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전술의 소유자이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모양보다는 ‘실제(實際)’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후주의 군인이나 고관대작들 가운데서 조광윤의 품격을 닮은 자는 남당을 평정할 때 주장이었던 조빈(曹彬) 외에는 별로 찾아 볼 수가 없다.
조광윤은 자신의 관직품계를 따지지 않았고 모든 일에서 다투지 않았다.
고평전투에서 대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선뜻 나서서 싸웠고 세종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를 구해주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단지 ‘전전산원도우후(殿前散員都虞侯)’의 직을 얻게 되었다.
사실상 절반의 계급만 승진한 셈이었다. 금군을 정비할 당시 조광윤은 대권을 행사했지만 관직은 ‘산원(散員)’이라는 두자가 빠진 ‘전전도우후(殿前都虞侯)’였다. 역시 절반의 계급만 승진한 셈이다.
세종의 회남출정에서 조광윤은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위풍을 떨쳤지만, 직무는 여전히 전전도우후였고 장영덕 수하에서 묵묵히 일했다.
조광윤은 남의 말을 대변하거나 남에게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을 받고 금군을 정비할 때도 단지 노약자를 퇴출시키고 천하의 장사들을 징모했지, 금군의 장군을 추천하지 않았으며 상관의 지시에 따라 일했다.
세종에게도 간언을 많이 하지 않았고 매번 전투는 명령대로 철저하게 수행하여 백전백승했다. 이렇게 다툼이 없고 부정(不正)이 없이 처신한 것은 조광윤의 똑똑한 허세전략이었다. 역대 어느 제왕에게서도 이런 순박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면서도 고심해 처세한 황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1. 의사십형제(義社十兄弟): 전장(戰場)의 맹우(盟友)들
950년 24세에 말단 병사로 군에 입대한 조광윤은 먼저 후한 추밀사 곽위 휘하에 있다가, 곽위가 후주의 태조가 된 후에 금군에 배치된 이후 세종을 도와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군공을 쌓고, 959년 불과 10년 만에 군 최고사령관 전전도점검이 되었다. 조광윤이 승승장구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공, 용맹함, 후덕한 인품을 두루 갖춘 무장으로서, 병법에 밝은 최고의 군사전략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면에 있어서도, 임무에 성실하고, 성격이 활달하며 강인하면서도, 대인관계에 있어서 유연하고 지조를 지키며, 황제를 조심스럽게 모시고, 동료와 깊은 우정을 쌓으며, 이익을 적게 추구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순박하고 자연스럽게 처세하였다.
탁월한 재능과 신중한 처신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풍성한 성과를 가져다준다.
조광윤이 비록 개인세력은 키우지 않았지만, 그의 특출한 재능과 훌륭한 처신으로 자연스럽게 영향력이 커졌다. 일찍이 후주 세종의 위임을 받아 금군을 정비할 때 그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금군을 정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주로 금군의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후주군(後周軍) 정비의 대권을 거머쥔 그는 교만하지 않고 전전사의 중급 장군들을 형제처럼 대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리하여 전전사에는 조광윤이 이끄는 ‘의사십형제(義社十兄弟)’라는 결사(結社)가 생겨났다. 군자는 “뜻을 같이 하는 자를 벗으로 삼고”, 소인은 “같은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벗으로 삼는다.”는 말이 있듯이, 조광윤의 ‘의사십형제’도 그러했다. ‘의사(義社)’는 “이익을 챙겨 의리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형제(兄弟)’는 “뜻을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사활동의 목적은 서로 연합해 적을 무찌르는 것이었는데, 후주 태조 때부터 크게 성행하여 많은 부대에 이러한 결사가 있었다. 이는 아마 군의 단합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황제의 의도적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의사십형제가 결속된 후 그는 군의 계급을 따지지 않고 한 일원으로서 처신했다.
의사십형제의 구성은 전전도우후 조광윤, 시위보군도지휘사 이계훈, 전전도우후 석수신, 전전도우후 왕심기, 공학군(控鶴軍)도지휘 한중빈(韓重贇), 철기우상(鐵騎右廂)도지휘사 유광의(劉光義)와 양광의(楊光義), 유의경(劉義慶), 유수충(劉守忠), 왕정충(王政忠) 등 10명의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금군의 맹장들이었고 남정북전의 주력들이었다. 의리를 중시해 결사한 이들은 ‘형제의 정’을 맺고 싸울 때는 난공불락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의사십형제는 후주 세종을 따라 회남출정에 나서 파죽지세의 위풍을 떨치고 가는 곳마다 승전보를 전했다. 이렇게 되자 후주군 내에서의 조광윤의 세력이 점점 커져 후에는 누구도 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해졌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군의 최고사령관까지 된 것이다. 이러한 개인세력의 결집은 결코 그가 의도적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 후주정권을 위해 피를 흘린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후주 세종이 회남을 정벌할 때, 조광윤은 명을 받고 남당의 수춘성(壽春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조광윤 일행이 가죽으로 만든 배를 타고 물가에 진입했을 때 수춘성에 있던 남당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수만 발의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왔다.
그때 한 배에 타고 있던 장경(張瓊)이 몸으로 조광윤을 엄호하다가 다리에 화살을 맞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 때 다리뼈에 깊숙이 박힌 화살촉을 아직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장경은 주위 사람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몇 모금 마시고는 안간힘을 다해 화살촉을 뽑아냈다.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 나왔지만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조광윤에 대한 부하의 충성심을 알 수 있고, 조광윤이 왜 의사십형제를 결성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군에도 과거에 ‘하나회’라는 결사체가 있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생을 주축으로 하여 1963년 결성한 모임으로,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회장을 맡았으며 1979년 박정희대통령 서거 이후 발생한 12. 12 군부쿠데타의 주동적 역할을 맡았다.
그리하여 전두환과 노태우 두 명의 회원이 대통령이 되었다. 의사십형제와 하나회 두 모임 간에는 군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결사체라는 점과 조직의 우두머리가 국가원수가 되었다는 점은 같았으나 모임의 목적, 성격, 활동, 종말 등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