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민위방본(民爲邦本)’의 국가경영철학 구현 <09>

제2절 언제나 백성 편에 선 따뜻한 황제 (07)

역사의 교훈을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조광윤은 어릴 때부터 신문열(辛文悅)이라고 하는 스승을 모시고 공부했기 때문에 부역(賦役)에 의해 진나라가 망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부역의 징용에 대해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라가 부역을 원활하게 징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조광윤은 경성(京城)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京畿)지역 16개 현의 인구수를 재조사하도록 명했다. 그 결과 변경부(汴京府)에서 집계한 수가 전보다 많아진 것 외에 기타 현(縣)들은 모두 원래보다 인구수가 적어졌다.

이것은 필연코 부역의 배정을 공평하게 하지 못한데서 생긴 문제라고 조광윤은 생각했다. 돈 있고 세력 있는 자들은 관리와 결탁해 부역을 회피하거나 다른 백성에게 돌렸다.

이에 대해 조광윤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각 현(縣)에서 부역을 결정할 때 세력가들은 부역을 회피하게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과중한 부역을 배정한다면 관직을 파면할 것이다.」

그리고 제방을 쌓고 수로를 정비하는데 백성을 동원하기 위해, 그는 하남부(河南府), 경동(京東), 하북(河北)의 47개 군부(軍府)와 주에 명령을 내려 각기 주의 판관(判官)을 자기 관할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파견해 인구수를 점검, 등기하고 호적부를 만들어 세력가나 대부호들이 부역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동시에 백성들이 억울한 경우가 생기면 언제라도 고발할 수 있게 규정하고, 사실이 규명되면 담당 관리(官吏)의 죄를 묻기로 했다.

나라가 수리(水利)사업을 하고 홍수방지 등 공익사업을 추진할 때는 부역을 징용해야 한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대량의 부역을 징용해 여산묘(驪山墓)와 아방궁(阿房宮)을 수축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부역도 성격에 따라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부역을 어떻게 징용하며, 백성을 어떤 위치에 놓고 고려하는가? 또 민생을 근본으로 하느냐, 아니면 나라를 근본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들이 대두된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송태조 조광윤은 부득이 하게 부역을 징용했으나 항상 그 형평성에 대해 고심했다.

부호나 세력가들이 교활하게 부역을 회피하거나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 과중한 부역을 배정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각 주의 판관들이 서로 다른 주의 부역기준을 상호 점검케 하는 교묘한 방법을 도입했고, 정책의 공개화와 집행의 투명성을 통해 부역을 공평하게 배정하도록 했으며, 백성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대자연의 법칙은 여유 있는 것은 감소시키고 부족한 것은 보충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부역의 배정에서 표출된 조광윤의 조치는 실로 부호의 회피를 방지하고 가난한 백성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선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