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민력(民力)을 아껴 부역(賦役)을 최소화
송태조 조광윤은 행동으로써 자신이 ‘질박(質朴)하고 자연스러운 통치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에게는 휘황찬란한 이론이 없었다. 전제시대의 제왕이었지만 조광윤은 단순히 백성을 아끼며 사랑하고 백성이 잘 살게 하는 소박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실천해나갔다. 국가에서 부역(賦役)을 징용하는 면에서 그는 이전의 황제들보다 더 많은 은덕을 베풀었고 훌륭하게 처리했다.
부역은 통치계층이 강제로 백성에게 무상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힘든 노역이었다. 백성을 아끼는 조광윤은 나라가 부역을 징용하는데 대해 매우 신중하게 결정했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인력을 징용했다.
961년(태조2)에 송나라에서 오장하(五丈河)를 준설할 때 그는 사중(事中) 유재(劉載)에게 인부 3만 명을 동원하라고 명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짐(朕)은 나 자신을 위해 백성을 부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번 준설작업은 변경에서 회하(淮河)를 거쳐 운하(運河)로 진입하는 수송로를 개통해 경성(京城)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역대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아끼지 않고 마구 부역을 징용했다. 그 결과 왕왕 백성의 반란을 야기했고 왕조의 파멸을 초래하기도 했다.
진(秦)나라 때 조정은 과중한 부역을 수없이 징용했다. 잘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은 만리장성을 쌓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백성들로부터 부역을 징용했다. 2대 황제 호해(胡海)는 하남 등지에서 9백 명의 수비병졸을 부역에 징용하여 어양(漁陽)에 주둔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어양으로 가는 도중 대택향(大澤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정한 날짜에 당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엄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압송하는 호위병을 죽이고 막대기를 병기로 삼아 진나라에 반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수십 년 동안 가혹한 부역에 시달려온 진나라 백성들은 이에 호응했고 천하의 영웅호걸들도 일제히 궐기하여 마침내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를 뒤엎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