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황권(皇權) 강화를 위한 ‘중앙집권제’ 확립 <26>

제5절 절도사(節度使)들의 막강한 권한 축소 (04)

송태조 조광윤이 절도사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정에서 지방으로 파견한 이 관리들은 ‘권지주사(權知主事)’라 불렀고 약칭은 ‘지주(知州)’이다. ‘권지(權知)’란 지주(知州)의 권한을 행사하고 임시 관리한다는 뜻으로 무인들이 독점했던 절도사직이 세습되었던 것과는 달리 권지의 임기는 3년이었다.

이러한 관리임용제도는 아주 절묘한 점이 있었다. ‘권지’라는 관직은 임기직이지만 ‘지(知)’란 주관한다는 뜻으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사실상 주정부(州政府)의 1인자로서 군사, 행정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원래에 있던 관리들은 직무는 있으나 피지배적인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정부에도 ‘주사(主事)’라는 직급이 있는데 이는 6급의 실무 공무원을 의미하며 ‘직급’을 표시할 뿐 ‘직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주사(主事)’의 어원은 아마도 송태조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의 ‘주사(主事)’는 절도사를 대신하는 막강한 지방행정장관을 가리키는 것이 크게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말 고종과 순종 당시 ‘대한제국’의 중앙행정기관에는 ‘주사(主事)’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하는 협판(協辦) 다음 가는 직책을 맡는 고위공무원이었던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문관으로 절도사직을 교체하는 것은 사실상 비상시기에 지방에 대해 실시했던 군사적 통제를 마무리 짓고 평화시기의 정상적 통치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었다.

본래 절도사는 몇 개 주의 군사를 관장하는 직책을 수행하면서 지방에 임시로 거주하는 장군들이었으며 결코 지방의 행정을 관리할 책임은 없었다. 당(唐)나라의 ‘안사의 난(安史之亂)’ 이후 절도사들이 병력을 가지고 스스로 위세를 부리며 지방할거를 시도하고 나서부터 절도사들이 지방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오대(五代)시기에도 지속되었다. 백성들은 장기간 군사관제 아래서 생활했고, 그것은 농업생산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으며, 나라의 경제와 문화 건설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송태조 조광윤이 절도사의 권력을 축소한 것은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평화시기에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켜 백성과 나라가 함께 부유해지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며, 이것은 전쟁이 끝난 국가의 필연적 요구이며 이치에 맞는 당연한 통치행위로서 모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건국책(建國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