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황권(皇權) 강화를 위한 ‘중앙집권제’ 확립 <20>

제3절 금군(禁軍)을 개편하여 제도적으로 병권(兵權) 장악 (13)

 5.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 오장하(五丈河) 준설감독 윤훈(尹勛)을 용서하다

 

963년(태조4) 3월, 조광윤은 윤훈(尹勛)에게 명하여 오장하(五丈河) 준설 인부들을 감독하게 했다. 윤훈은 책임감이 강한 자였으나 지나치게 인부들을 닦달했기 때문에 진류(陳留)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한밤중에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병졸들을 이끌고 가서 도망갔던 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그리고는 주모자 10명은 참수하고 70여명은 귀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다. 윤훈의 이런 잔혹한 행위는 사회의 공분을 일으켰고, 많은 인부들이 경성(京城)에 올라와 윤훈을 엄히 처벌해 줄 것을 호소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이도(李濤)는 분노를 참지 못해 아픈 몸을 끌고 조광윤을 찾아가 백성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훈을 참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조광윤은 이도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독려해 주었다.

이는 그의 의견을 수락하는 것을 뜻하므로 일을 저지른 자를 가중 처벌하지 않는다면 필연코 이도의 신임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광윤은 신임을 좀 잃더라도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윤훈을 가볍게 처벌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 후촉 평정 후 군기문란죄를 범한 왕전빈(王全斌)을 용서하다

 

후촉을 평정한 왕전빈, 최언진, 왕인섬 등은 전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후촉에서 많은 범행을 저질렀다. 어사대에서 중신들을 모아 논의한 결과, 왕전빈 등의 죄질이 매우 나쁘므로 법에 따라 응당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결과는 조광윤이 그들의 죽을죄를 특별히 사면해 주고 그들에게 강직처분만 내렸으며 강탈한 재물과 자녀들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조광윤은 일관되게 군을 엄격히 다스려왔는데 무엇 때문에 왕전빈 등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가벼운 처분을 했는가? 이것은 그가 출병할 때 왕전빈 등에게 가벼운 약속을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출정을 고하는 자리에서 조광윤은 그들에게 후촉을 공략하는 계책을 지시했었다.

「이번 토벌의 목적은 땅을 빼앗는 것이다. 도성과 촌락을 공략하면 병기, 군량, 마초 등만 기록하고 모든 금전과 면직물은 병사들에게 나누어준다. 우리가 탈취하려는 것은 오로지 토지뿐이다.」

돈과 면직물을 다 병사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이 약속 때문에 왕전빈 등에게 투기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광윤은 왕전빈 등에게 가벼운 처분을 내리게 되었고, 반면에 신하들에게는 어느 정도 신용을 잃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지도자가 겪는 ‘말 못할 어려움’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