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으로 병권과 정권의 관계, 그리고 병권이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현실을 명확히 파악한 송태조 조광윤은 국가의 최고 군사지휘자인 전전도점검의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황제가 겸임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고, 황제가 바로 군대의 최고통솔자로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조광윤의 이러한 정치적 조치를 한마디로 비유한다면 “강을 건넌 뒤 다리를 부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부터 시작하고, 천하의 큰일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광윤은 바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쉽고 섬세한 문제를 잘 처리해 나갔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큰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1. 황제 즉위 후 신속하게 금군 고위직 인사 단행
진교병변 전에 후주 금군의 최고사령관은 전전도점검 조광윤이고, 그 다음으로 전전부도점검 모용연소, 전전도지휘사 석수신, 전전도우후 왕심기였다. 시위사 가운데서 마보군도지휘사 이중진, 마보군부지휘사 한통, 마보군도우후 한영곤이었으며, 마군도지휘사는 고회덕, 보군도지휘사는 장영탁이었다.
황제에 등극한지 1주일 만에 조광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금군지도자에 대한 인사개편을 전광석화 같이 단행했다. 조광윤은 우선 석수신을 한통이 맡았던 시위마보군부지휘사로, 전전도우후로 있던 왕심기를 2계급 특진시켜 전전도지휘사로 임명했다. 이것은 석수신과 왕심기가 다 조광윤이 결성한 ‘의사십형제’ 멤버들이고 진교병변 때 내응했던 장군들로서 병권을 장악한다 해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동생 조광의를 전전도우후로 임명했다. 이밖에 그는 좌상호첩도지휘사 장광한을 시위마군도지휘사로, 우상호첩도지휘사 조언휘를 시위보군도지휘사로 각각 승진시킴으로써, 이 두 금군의 중급 장군이 고위장군 반열에 오르도록 했다. 또 조광윤은 자신이 전에 맡고 있던 전전도점검 자리에 전전부도점검 모용연소를 승진시켰는 데, 이는 임시방편으로서 잠재적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회덕을 전전부도점검으로 승진시키고, 장영탁을 시위보군도지휘사에서 시위마보군도우후로 발령하여 약간 좌천된 것이지만 크게 부당한 점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친구였던 한영곤을 이중진이 맡았던 시위마보군도지휘사로 승진시켰다. 조광윤은 사실상 이번 금군지도자에 대한 인사개편에서 소의군절도사 이중진이 겸하고 있던 중앙의 시위마보군도지휘사 직무만을 해제시켰고, 나머지 장병들은 모두 승진시키거나 수평 이동시켰고, 면직은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적용했다. 역사상 개국황제 중에서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을 쉬운 데부터 착수하고, 큰일은 사소한 데로부터 시작하는 책략’을 훌륭히 실행한 황제는 조광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광윤은 쉽고 사소한 일부터 착수하여 실시했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반년이 지나서 조광윤은 시위마군도지휘사 장광한을 한중빈(韓重贇)으로 교체했다. 한중빈도 의사십형제의 멤버였다. 그리고 시위보군도지휘사는 조언휘 대신에 나언괴(羅彦瑰)로 교체했다. 나언괴를 등용한 것은 그가 황제로 등극할 때 뛰어난 기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진교병변 당시 후주의 재상 범질은 조광윤의 등극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때 나언괴가 검을 빼들고 범질을 위협하면서 병변의 뜻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금군 장군들에 대한 두 차례 인사조정을 거친 후 송조(宋朝)의 금군은 안정된 모습을 보였고, 조광윤도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961년(태조2) 3월, 조광윤은 금군 최고위장군 모용연소를 전전도점검에서 해임하고 남서도(南西道)절도사로, 한영곤을 시위마보군도지휘사직에서 해임하고 성덕(成德)절도사로 임명했다. 이로부터 최고위직인 전전도점검 자리를 비워 놓고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황제가 친히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군의 최고통솔자로서 결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송조(宋朝) 금군의 주요 장군들을 모두 의사십형제와 측근으로 교체함으로써, 조광윤은 더 이상 타인이 병권을 찬탈하거나 병권을 이용해 정권을 좌지우지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