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넌 후 다리를 부숴버리는 격”이지만, 시대적 요청에 의해 황제가 된 조광윤에게 있어서 초미의 시급한 과제는 황제를 위협할 경우 가장 위험한 세력이 될 수 있는 금군 고위장군들에 대한 인사조치였다. 그 다음, 제도적으로 군과 중앙정부의 기능 및 권한을 상호통제시스템으로 조정하고 지방정부의 권한을 축소하여 중앙집권제를 성공적으로 확립함으로써, 오대시기를 거치면서 군화 발아래 짓밟혔던 황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넓은 포용력으로 옛 왕조의 문무신하들을 모두 그 자리에 있게 함으로써, 분열과 투쟁의 정치를 마감하고 ‘화합의 정치’와 ‘열린 정치’를 열어나갔다. |
전제사회에서 지도자의 권위는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입에 발린 말만 하고 자화자찬하거나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 과감히 어떤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능력과 자질이 기본요건이다.
대개의 전제제왕들은 입으로는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거나, 늘 ‘밝은 정치’, ‘맑은 인사관리’를 부르짖지만 능력과는 관계없이 가까운 사람만 임용하며 측근자를 비호한다. ‘패거리정치’를 선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주의 제도 하의 국가 지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전제제왕으로서 조광윤은 달랐다. 10년 간 탁월한 군사재능과 정치수양에 의해 조광윤은 일개 병사에서부터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가 백성의 뜻을 받아들이고 국가에 대해 일련의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갖추게 된 그 위엄은 소박하나 하늘을 찌를 듯했다.
봉건 전제사회에서는 황제는 지고무상(至高無上)한 권위를 세워야 했다. 이는 전제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권위가 없고 군신이 구분되지 않으면 전제(專制)가 수립될 수 없으며, 심지어 국가는 와해되거나 변란의 위협을 받게 된다. 자고로 황제는 높은데서 아래의 상황을 굽어보는 나라의 최고지도자였다.
당말(唐末)에서 오대(五代)시기에 이르러 옛날 제왕의 위엄은 없어지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대신들이 횡포를 부리고 제왕에게 예우를 갖추지 않았다. 제왕을 폐위시키고 새로 제왕을 옹립시킨 측근 신하들은 제멋대로였고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서 군림하려 했다.
후주시기에 그는 늘 세종 시영(柴榮)과 함께 대전(大殿)에서 앉아 문제를 상의했고 군신지간에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므로 황제로 등극한 초기에 조광윤은 의식적(儀式的)으로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려 하지 않았고, 역시 대전에서 신하들과 함께 앉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문제를 상의하곤 했었다.
1. 대전(大殿)에서 재상 범질(范質)의 의자를 없애다
송태조 조광윤은 대전(大殿)에서 신하들과 함께 앉아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문제를 상의하는 것이 조정의 질서와 기강을 진작시키는데 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바로잡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 신하의 도움을 받아 계책을 세웠다. 조정에서 재상은 문무백관의 가장 높은 자리이기 때문에 황제에게 상주(上奏)할 때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조광윤이 즉위한 그해 어느 날, 조정대신들이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 입궐했다. 대전의 의자에 앉아 있던 재상 범질이 상주문을 들고 읽으려 하자 조광윤이 말했다.
「오늘 짐(朕)은 귀가 잘 안 들리오. 재상의 말소리도 낮고 하니 짐(朕)이 직접 보도록 이리로 가져 오시오.」
범질은 의자에서 일어나 상주문을 황제에게 갖다 올렸다. 그런데 그가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온데 간데 없어진 것이다. 내공이 심후한 범질은 이에 당황해 하지 않고 태연하게 몸을 돌려 조광윤 앞에 기립자세로 서 있었다. 신하들이 이 광경을 보고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조광윤을 향해 기립자세를 취했다.
이리하여 대전에서 대신들의 의자를 모두 철거했다. 이를 통해 조정은 다시 당나라 때의 예의를 회복했고, 황제인 조광윤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여 황제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