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조광윤은 이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후주의 중신이며 세종 시영(柴榮)과 형제처럼 지냈던 이균은 후주에 충성할 사람이고 결코 후주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주 세종은 그를 소의절도사로 봉하고 노주를 수비하도록 했으며 그 외의 4개 주를 통솔하도록 했다. 두 개의 중요한 재부의 공급지역인 하동(河東)과 하북(河北)을 관할하게 된 그는 당시 후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진 번진(藩鎭)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절도사로 있는 동안 그 지역의 황제인양 횡포를 부려 세종마저도 삼분 양보했다.
이균의 성격은 매우 복잡하여 비록 포악하고 제멋대로였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했다. 이균은 성격이 광폭하여 한마디만 거슬려도 죽이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어진 어머니가 병풍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용서를 호소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귓등에도 듣지 않지만 어머니가 입을 열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방면하곤 했다.
이균은 그를 중서령(中書令)으로 봉하기 위해 조광윤이 보낸 사자가 조서를 가지고 갔을 때 자신의 세력을 믿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후주 태조 곽위의 초상화를 대청 안에 걸어 놓고 때때로 그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이균은 용감했지만 지략은 없었다. 북한에 항복하면 북한의 지지를 얻어 연합해 이제 막 개국한 송나라를 손쉽게 정벌할 줄 알았다. 그러나 북한왕 유균(劉筠)은 이균의 항복을 성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균도 송나라를 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멸망시키고 싶었지만 힘이 모자랐다.
이균의 항복을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란과 연합하려 했다. 그런데 이균이 거란과의 연합을 원치 않자 심기가 불편해진 북한왕은 이균에 대한 의심이 생겨 선휘사(宣徽使) 노찬(盧贊)을 파견해 이균의 군대를 감시하도록 했다. 이균의 부대로 파견된 노찬이 마치 용병(傭兵)을 주관하는 감독관처럼 행세하자 이균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노찬이 매번 이균과 함께 군사(軍事)를 상의하려 하면 이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노찬과 이균은 갈등이 생겼다. 노찬이 이 일을 북한왕에게 보고하자 그는 또 재상 위융(衛融)을 보내 화해시키려 했다. 특수한 정치적 배경에서 맺어진 이균과 북한의 연맹은 굳건하지 못하고 각자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응집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균에게는 여구중경(閭丘仲卿)이란 부하가 있었는데, 그는 이 연맹의 약점을 보고 이균에게 말했다.
「장군께서 고군분투하시어 거사를 일으키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겉으로는 북한의 지원을 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로 유력한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여긴 이균은 좋은 생각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그가 건의를 내놓았다.
「현재 송나라의 군사력은 강대하고 무기와 장비도 우수합니다. 그러므로 송나라와 결전을 벌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쪽의 태항(太行)으로 내려가 낙읍(洛邑)에 주둔해야 합니다. 그 다음 북한과 연합하고 다시 거란과 연합합니다. 북한은 태항의 서쪽에서 거란은 유주(幽州)로부터 남쪽으로 진격하면 송나라는 삼면에서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때 가서 우리가 동쪽으로 출정한다면 천하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고집인 이균은 자신이 강대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후주의 노장이고 세종과 형제처럼 지냈네. 송나라 장수들은 다 나와 잘 아는 사이어서 내가 온다는 소문만 들으면 창을 거꾸로 들 것이오. 게다가 나에겐 용맹한 장수 1천명에 준마 3천 필이 있소.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이균은 밤낮으로 병마를 준비하고 직접 공격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균은 노주에서 출병하여 먼저 송나라 택주성을 점령했다. 이는 동쪽으로 내려가 변경(汴京)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태항산(太行山) 마루에 위치해 있는 택주는 하삭(河朔)의 요충지였다. 택주에서 북쪽으로 가면 거침없이 태원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나아가 하삭을 공략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태항산을 내려와 곧장 맹주, 회주로 진입할 수 있어 변경(汴京)을 압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