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04>

제2절 무혈쿠데타 진교병변(陳橋兵變) (02)

어린 황제가 즉위한 후 반년 동안 조용했던 조정은 960년 정월 초하루 대신과 무장들은 신년축하회를 열고 변경성은 명절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진주(鎭州)와 정주(定州)에서 긴급한 군사첩보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북한군이 토문(土門)에서 동쪽으로 내려와 거란군과 연합하여 침공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황제는 세상사를 알 리 없고 변경성은 신년축하 분위기에 빠져 있는데, 이런 군사첩보가 날아왔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조정의 일을 집정하고 있던 범질, 왕부 등 재상들은 졸지에 당황했다.

재상 범질은 재상 왕부, 전전도점검 조광윤, 전전도지휘사 석수신을 급히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조광윤은 중후한 풍채에서 울려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황제께서 북벌을 단행하시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아직도 우리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제 대업은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지금 북쪽의 적은 우리 유주(幼主)를 업신여기고 감히 병마를 일으켰으니, 모두 발해(渤海)의 차가운 물의 고혼(孤魂)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조광윤은 석수신을 보고 말했다.

「내가 나가 적을 맞겠으니 석장군은 도성에 남아 유주를 보호해 주시오. 재상들께서는 염려를 놓으시고, 승전보를 기다려 주십시오.」

이들은 조광윤의 제의에 흔쾌하게 찬성했다. 금군은 두개의 부대로 나누어 절반은 석수신의 지휘를 받아 도성을 지켰고, 절반은 조광윤의 지휘를 받아 북한군을 맞아 싸우기 위한 북정(北征)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화급한 상황에서 군사첩보에 대해 진위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공제(恭帝) 명의로 조광윤에게 조령을 내려 금군을 이끌고 적을 물리치도록 했던 점이다.

 

반년동안 경성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던 조광윤은 다시 만인의 관심 속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경성의 저잣거리나 주점, 찻집에 사람들이 모이면 쑤군거렸다.

「다음에는 누가 황제가 될까?」
「점검이야, 점검이 천자가 된다는 노래도 못 들었냐?」
「장(張) 점검은 이미 파면되었는데, 무슨 점검이 천자가 돼?」
「조(趙) 점검은 점검이 아니냐?」

소문은 꼬리를 이어 발생했다. 성내의 많은 백성들은 불안한 심리에 당장이라도 경성을 떠나고 싶었지만, 금군이 성문을 굳게 지키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웠다. 많은 사람들은 짐을 싸고 여차하면 도망갈 채비를 갖추었다. 특히 시집 안간 처녀가 있는 집안은 바짝 긴장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도성은 온갖 약탈, 강간과 방화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약탈을 빗대어 ‘정시(靖市)’라고 불렀다. 이 말은 “도성(都城)의 저잣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비아냥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백성들에게 스스로 몸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경고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960년 1월 2일, 조광윤은 전전부도점검 모용연소로 하여금 병력 5만 명을 통솔해 먼저 출병하도록 했다. 그 다음날 조광윤이 8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그 뒤를 이어 출정했다. 형형색색의 깃발을 높이 들고 완전 무장한 장병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행군하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변경성(汴京城)의 관민들은 큰 일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고 모두 대로변으로 나와 이 질서정연하고 군기가 준엄한 대군을 지켜봤다.

대군이 애경문(愛景門)을 나서자 경성 사람들은 실망했다. 점검 조광윤이 황제가 된 것이 아니고 예전처럼 싸우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