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백전불패의 군사전략가이자 천하무쌍의 맹장(猛將) <10>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4)

 4. 육합진전투(六合鎭戰鬪)

 

▶ 선엄후교(先嚴後敎)의 육합진(六合鎭) 이야기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동(主動)을 쟁취하는 것이다. 조광윤은 항상 주동을 쟁취했기 때문에 매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남당왕 이경(李璟)은 후주에 사자를 보내 많은 재물을 헌납하며 휴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종의 목적은 남당의 강북지역을 전부 회수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는 휴전요청에 불응하고 오히려 진공하도록 군사를 독려했다.

휴전요청이 무산되자 남당왕은 저항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세종은 계속 수주를 포위하는 한편, 강북의 요충지 양주(揚州)의 병력이 적은 틈을 노려 한영곤(韓令坤)을 시켜 양주를 공격하게 하여 단숨에 양주를 점령했다. 후주군이 수도 금릉의 안전을 직접 위협하자 남당왕은 제왕(齊王) 이경달(李景達)을 원수(元帥)로 내세우고 정예병 6만 명을 선발하여 강북에 가서 후주군과 싸우도록 명했다.

956년 4월초, 남당의 우위장군(右衛將軍) 육맹준(陸孟俊)이 상주(常州)에서 1만여 명을 이끌고 태주(泰州)를 공격하여 수복한 후 이어서 양주를 공격했다. 남당군의 맹렬한 기세에 눌린 한영곤은 양주성을 탈출했다. 한영곤이 양주성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세종은 조광윤에게 명하여 2천 명의 금군을 이끌고 가서 후주군의 후퇴를 저지하고 양주성을 보존하도록 명했다. 2천 군사를 이끌고 급히 양주 서쪽의 육합진(六合鎭)에 당도한 조광윤은 양주로 왕래하는 길목에 군사를 배치하고 엄한 군령을 하달했다.

「육합(六合)을 지나는 양주병(揚州兵)은 누구를 막론하고 병사든 장군이든 모두 양다리를 절단시켜라.」

조광윤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하 2천 장병들은 냉혈한으로 변해 양주의 후퇴병을 기다렸다. 탁월한 군사지휘능력을 지닌 조광윤에게도 측은지심이 있었다. 차마 육합진에서 형제와 같은 아군의 패잔병들에게 칼을 들이댈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사람을 파견해 아직 육합진에 당도하지 않은 한영곤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알리도록 했다. 소식을 들은 한영곤부대는 차마 상해(傷害)를 입히려 하지 않는 조광윤의 따뜻한 배려에 감격해 했다. 생각을 바꾼 한영곤은 후퇴를 멈추고 죽기 살기로 다시 양주를 쳤다. 결국 육맹준을 사살하고 남당군을 대패시켰다. 양주를 되찾은 그들은 계속 성을 잘 지켜나갔다.

육합진의 후퇴병 저지에서 조광윤은 군법에 의해 호된 명령을 내렸고, 한편으로는 인정을 베풀어 형제간에 상해를 가하지 않도록 했다. ‘선엄후교(先嚴後敎)’의 지략을 발휘해 군법과 군기를 집행하고 후퇴병을 막으면서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한 것이다. 30세 밖에 안 된 조광윤은 이미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는 제왕지심(帝王之心)을 실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