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백전불패의 군사전략가이자 천하무쌍의 맹장(猛將) <08>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2)

2. 허장성세로 20배의 남당군을 무찌른 청류관전투(淸流關戰鬪)

 

『주역(周易)』에서는 “재능을 품고 있어도 그것을 뽐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군주를 보좌하게 되면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하고 공을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조광윤이 바로 그와 같았다. 과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자기 공으로 돌리지 않고 묵묵히 세종을 따라 계속 남하했다.

956년 2월 2일 후주군은 하채(下蔡)에 부교를 설치했는데, 조광윤은 세종을 수행해 시찰에 나섰다. 이 부교에 의지해 후주군이 회하 남안에서 남당군과 작전하면 크게 유리 할 것 같았다. 수주를 에워싸고 있는 후주군은 유인첨이 한사코 항복하지 않아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주 동쪽의 저주(滁州)에서는 황보휘와 요봉(姚鳳)이 10만 대군을 통솔해 수주와 호응하고 있었다. 저주에 있는 청류관(淸流關)은 남쪽으로 장강(長江)을 지키고 북쪽으로 회수를 통제하는 군사요충지이다. 청류관에 주둔하고 있는 황보휘와 요봉은 산과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진지를 엄수하고 있었다. 수주를 계속 함락하지 못하자 세종은 또다시 천하무적의 명장 조광윤에게 저주(滁州)를 고수하고 있는 적을 괴멸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는 5천명의 금군을 거느리고 수주에서 출발하여 곧장 저주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에 조광윤이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속히 저주로 가서 적군과 대진(大陣)해야 하네, 우리가 적을 압박할지언정 절대로 적들이 우리를 압박하게 해서는 안 되네. 『군지(軍志)』에 보면 “빼앗으려는 생각을 남보다 먼저 가져야 한다.”고 했네. 바로 적을 압박해야 한다는 말이네.」

조광윤은 급행군하여 당일 저주에 당도했다. 조광윤이 거느리는 군사는 5천 명이고 남당 황보휘와 요봉이 통솔하고 있는 군사는 10만 명으로 남당군이 후주군보다 20배나 많아 병력면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조광윤은 실로 용감하고 신출귀몰한 전술의 지휘관이었다. 남당의 10만 대군을 눈앞에서 두고 그는 5천 병사를 전부 포진시켜 남당군과 정면 대결할 형세를 취했다. 조광윤은 아름답고 정교하게 장식한 전마(戰馬)를 타고 있었다. 황금투구와 갑옷도 눈부신 광채가 돌았다. 이런 차림으로 노골적으로 적진 앞에서 신분을 드러내는 조광윤에 대해 부하들은 걱정했다. 이에 조광윤이 말했다.

「내 의도가 바로 적들이 나를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오.」

“교묘함이 극에 달하면 마치 아둔하게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조광윤이 사용한 것은 바로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전술이었다. 청류관을 지키고 있는 남당 대장군 황보휘와 요봉은 비록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나 위풍당당한 후주군의 기세를 보고 겁이 났다. 늠름하고 용맹스런 조광윤의 기풍을 보고는 더욱 겁이 났다. 과구에서 조광윤의 교묘한 매복전술에 의해 대패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속임수에 걸릴까봐 감히 출병해 후주군과 접전하지 못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성을 고수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황보휘와 요봉도 뛰어난 장군들이었다. 그들은 긴박하게 청류관 상하로 병력을 포진하여 후주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밤이 되자 군막 안에서 장병들에게 위로연을 베풀고 과구전투에서 조광윤의 매복군에 의해 대패한 교훈을 상기시켰다.

 

조광윤은 허장성세의 전술로 남당군을 꼼짝 못하게 한 후 은밀히 병마를 집결시켜 야간의 어두움을 틈타 남당군 정면방어선을 뚫고 청류관 뒤쪽으로 진입하도록 명했다. 날이 밝자마자 배후에서 후주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졸지에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황보휘와 요봉은 당황하여 군 지휘력마저 상실했다. 남당군은 대혼란 속에 빠지고 갈팡질팡했다. 수비군이 붕괴되자 그들은 사수하고 있던 청류관을 포기하고 저주성(滁州城)으로 도주해 성을 고수했다. 청류관전투에서 조광윤은 아군보다 20배나 많은 적군의 허를 찔러 불의에 공격하는 ‘기묘한 용병술’로 남당군은 사수하고 있던 방어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오대(五代)시기 뿐만 아니라 고대전쟁사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전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