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화려한 비상(飛翔)을 위한 용틀임 <14>

제4절 청년시절의 유랑(流浪)생활 (06)

▶ ‘의리의 사나이’ 조광윤과 미녀 경낭(京娘) 이야기

집을 떠난 조광윤은 황하를 거슬러 관서(關西), 호북(湖北)을 거쳐 북쪽의 전주(澶州)로 가는 기나긴 여행길에서 숱한 일을 겪게 된다. 그래서 후세의 문인들은 ‘협객(俠客) 조광윤’의 호방한 의협심을 흥미진진하게 엮어냈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유랑시절의 조광윤은 “힘이 장사여서 누구도 당할 수 없었으며, 기개가 사해(四海)를 덮을 정도로 웅대했고, 천하호걸들과 인연 맺기를 좋아했고, 길을 가다가도 불의한 일을 보면 검을 빼들고 약자를 도와 강자를 제압하는 오지랖이 넓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이 쓴 소설 이는 조광윤이 태원성 부근 태항산(太行山) 동쪽 기슭에 있는 청유관(淸油觀)의 도사(道士)로 있는 숙부(叔父) 조경청(趙景淸)을 만나기 위해 곡양(曲陽)에 들렀을 때의 이야기이다.
도관(道觀)에 기도하러 왔다가 외딴 방에서 불량배들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있는 여인의 비명소리를 들은 조광윤은 번개같이 뛰어 들어가 모두 때려누이고 그녀를 구해준다. 그녀는 경낭(京娘)이라는 산서(山西) 영제(永濟)에 사는 17세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한 조광윤은 경낭에게 천릿길도 넘는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다. 이에 감격한 경낭은 자신을 구해준 은인 조광윤을 의형(義兄)으로 삼았는데, 집으로 가는 도중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형에 대한 정이 깊어지자 그녀는 그에게 평생토록 몸을 허락하려 했다. 그러자 조광윤이 말했다.
「착한 누이야, 우리는 남매간인데 어찌 남녀 간의 정을 통할 수 있겠나? 애초에 의로운 마음에서 천리 길을 데려다 주려고 한 것인데, 우리가 불의하게 정을 통한다면 어떻게 헤어질 수 있겠나? 게다가 도와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해를 끼치는 꼴이 되니 군자의 도리가 아니지 않겠나?」
이에 크게 낙심한 경낭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그만 호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큰 은혜를 입은 오라버니의 생각이 정 그러하시다면, 이생에서는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죽어서라도 꼭 은혜를 갚겠어요!」
그리하여 후일 사람들은 경낭을 의형인 조광윤의 성(姓)을 따서 ‘조경낭(趙京娘)’이라 불렀고, 후일 송조정(宋朝廷)에서는 그녀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정의부인(貞義夫人)’이라는 별호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때 경낭이 몸을 던졌던 호수는 ‘경낭호(京娘湖)’라고 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조광윤과 경낭에 관해서는 후대에 많은 작가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조광윤이 그녀를 안전하게 호송해 머나먼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집에 도착한 경낭은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도 하고, 또는 그녀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소설 속 이야기들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가슴에 큰 뜻을 품은 기풍당당하고 도량이 넓은 청년 조광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