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된 후 금군에 대한 인사개편을 할 때 그는 자연스레 장경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그는 전전도우후를 맡고 있던 동생 조광의를 변경윤(汴京尹)으로 이동시키고, 장경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조광윤은 조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정을 호위하는 장병들 가운데 맹호처럼 용맹한 자만해도 만 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호령할 자는 장경 밖에 없느니라.」
뼛속에 꽂힌 화살촉을 뽑았던 장경의 용감한 행동을 연상해 보면 이러한 평가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군의 인사는 유광의(劉光義)를 시위마군도지휘사에 임명한 것이다. 유광의 역시 의사십형제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본래 조광윤과 함께 후한 말기에 곽위 휘하에 있던 말단 병사였는데, 후주 세종 때 내전직압반(內殿直押班)에 배치되어 세종을 따라 회남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움으로써 금군장령으로 승진되었다. 송나라 건국 초기에 그는 이미 용첩우상(龍捷右廂)의 중급 장군이 되었다. 그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중하고 명령을 잘 수행했기 때문에 조광윤의 신임을 얻었다.
송태조 조광윤이 중용한 또 하나의 중급 장군은 최언진(崔彦進)이다. 조광윤은 그를 시위보군도지휘사에 임명했다. 후주시기에 최언진도 금군 동서반(東西班)지휘사에 불과했으며, 송나라 초기에 공학우상(控鶴右廂)지휘사로 승진되었다. 그는 용감하게 싸우고 지혜와 지략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후주 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송태조가 이균과 이중진의 반란을 평정할 때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는데 바로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명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광윤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최언진은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재물을 모으기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에서는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없다.」
금군의 5개 최고위직을 장기간 공석으로 둠으로써, 금군에는 전전사의 전전도지휘사, 전전도우후와 시위사의 마군도지휘사, 보군도지휘사 등 4개 고위직만 보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4개 고위직에는 명성이나 경력이 얕고 젊은 중급 장군들로 충당했기 때문에 황제가 쉽게 통제할 수 있었고 또한 큰 화를 불러올 우려가 없었다. 금군의 지도체제는 힘이 크게 약화되었고, 황제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금군을 통솔할 권한이 없게 되었다.
이 결과 군대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새로운 군사체제가 형성되었다. 송태조의 이 조치들은 피상적으로는 그리 강력해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상은 초강수였다. 금군은 이로 인해 결코 전투력이 떨어지지 않았고, 금군의 고위직에 특별히 신임하고 말 잘 듣는 중급 장군들을 배정함으로써 금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장병들과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톱니바퀴〔輔車〕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이 변화에 의해 당말(唐末) 이래 군인이 정권을 좌우했던 폐단을 근본적으로 제거했다. 이번 인사개편은 신흥왕조의 정권을 견고히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