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22>

제5절 최고의 국가경영자(CEO)로서 송태조의 세 가지 화두(話頭) (02)

2. 두번째 화두(話頭): 백성의 평안을 위한 ‘민위방본’ 사상의 구현

 

‘민위방본(民爲邦本)’은 봉건시대 하에서 보기 힘든 송태조의 정치사상이다. 조광윤은 황제로 재위했던 17년 동안 계속 이 사상을 구체적 정책으로 실현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들이 역력하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발상을 통해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방면에 걸쳐 백성들의 안위와 넉넉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기발한 정책들을 개발해냈다. 이에는 공평한 조세제도, 엄정한 사법제도, 공정한 과거제도, 농업 육성, 서민 구제 등 이루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극도로 혼란했던 무인집권시대를 거쳐 성장했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집권제를 강화해야 했던 전제봉건 전제정치체제 하에서 어떻게 황제 스스로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민위방본’이라는 ‘전제판(專制版) 민주주의’ 사상이 발현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서양에서도 17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등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시작했는데, 조광윤은 전제체제 시대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힘에 밀려 마지못해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도입했던 서양보다도 7-8백년 앞서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민위방본’의 사상과 그 실천을 위한 정책들을 자발적으로 펼쳐 나갔던 것이다.

송태조 조광윤이 등극한 후 추진한 많은 정책들은 노자의 『도덕경』에 의한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색채를 띠고 있다. 당나라 때 도인(道人)이었던 그의 오대조(五代祖) 조현랑(趙玄朗)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도덕경』은 한 편의 방대하고 깊은 정치철학의 보고(寶庫)인 동시에 정교하고 오묘한 병서(兵書)이다.

조광윤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전쟁을 수행할 때 도덕경의 정신을 깊이 터득하고 보다 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 중국 역대 황제 가운데서 송태조 조광윤은 유일하게 도가사상을 많이 이용해 천하의 민심을 얻은 황제라고 말할 수 있다.

 

3. 세번째 화두(話頭): 백성을 전란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천하통일’

 

후주의 세종이 재위하던 5년 동안 줄곧 천하통일 전쟁을 계속해, 후촉의 4개 주와 남당의 강북 땅과, 거란의 남쪽 일부를 평정하고 영토를 넓혔으나 아직 천하통일을 이루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조광윤은 전쟁으로 이어진 오대시기를 겪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에 징용되고 재물을 약탈당하고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어진 심성의 조광윤은 중국을 통일하여 분열시대를 종식하고 태평성대를 일구어 백성들이 평화로운 가운데 풍요롭게 살게 해야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진교병변을 통해 황제가 된 다음 바로 ‘선남후북(先南後北)’의 통일전략을 수립해 형남, 호남, 후촉, 남한, 남당 등 다섯 나라를 연이어 평정하여 당나라 이후 쪼개진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부득이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조광윤은 인간을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과 병사들의 생명을 존중시했다. 전면전(全面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가능한 한 국부적 평화담판으로 전쟁을 대체하는 통일방식을 추구함으로써, 중국역사에서 군대를 가장 많이 동원했으나 가장 적은 유혈과 사상자를 낸 본보기로 남게 되었다.

성(城)을 공격하면 마음 아파하고 죽은 자를 슬퍼하고 승리를 거두면 자축하기 보다는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런 특별한 행동과 표현은 조광윤의 용병의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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