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즉위 <21>

제5절 최고의 국가경영자(CEO)로서 송태조의 세 가지 화두(話頭) (01)

혼란했던 오대(五代)시기를 쉽게 마무리한 송태조 조광윤의 세 가지 화두는 (1)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 확립 (2) 후주 세종의 뒤를 이은 천하통일(天下統一) 실현 (3) ‘민위방본사상(民爲邦本思想)’ 구현이었다. 이 사상은 조광윤 국가경영철학의 백미(白眉)로서 ‘백성이 나라의 기틀’이라는 전제정치제도 하에서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이 즉위한 해에 이미 이균과 이중진의 두 반란을 평정한 이후 나라 안에 적대세력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즉위 2년째인 961년에 무엇보다도 먼저 황권(皇權)을 강화하고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국가안정 책략을 수립했다. 조광윤은 책략가 조보에게 물었다.

「당나라 말기 이래 천하는 수십 년 동안 황제의 성(姓)이 여덟 번이나 바뀌었소. 그동안 전란은 끊이지 않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오? 짐(朕)은 천하의 병사들을 쉬게 하고 나라를 오래 지탱하기 위한 책략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소?」

조보가 아뢰었다.

「폐하의 말씀은 천지인신(天地人神)의 복을 위한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번진의 세력이 너무 크며 임금보다 신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다스리는 것은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그 권한을 축소하고, 재정권을 통제하고, 병력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천하는 자연히 안정될 것입니다.」

송태조 조광윤이 말했다.

「경(卿)의 말이 지당하오. 짐(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1. 첫번째 화두(話頭): 황권 강화를 위한 ‘중앙집권제’ 확립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五代) 시기까지 약 200년 동안 지방절도사를 중심으로 하는 군벌들의 무인집권시대가 지속되었던 까닭에 황제의 권위는 군화(軍靴) 발아래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조광윤은 우선 강대한 절도사들과 무장들의 병권, 재정권, 인사권 등의 권한을 축소하여 중앙집권제를 확립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그는 무관보다 문관을 우대하는 정책과 그 바탕이 되는 과제제도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실시했다. 그리고 절도사와 무인들의 병권을 회수하는 데에도, 다른 창업 황제들의 무자비하고 참혹했던 방법과는 달리 부드럽게 연회(宴會) 좌석에서 한 잔의 술로 병권을 빼앗았다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등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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