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백전불패의 군사전략가이자 천하무쌍의 맹장(猛將) <14>

제5절 전쟁사에 빛나는 남당(南唐) 정벌 (08)

8. 청구전투(淸口戰鬪)에서 남당 주장 진승소(陳承昭) 생포

남당수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세종은 회하 북안에서, 조광윤은 회하 남안에서, 후주수군은 물살을 타고 동진하여 3로(三路) 대군이 함께 청구로 향했다.

오랜 세월 행인이 없던 회하강변은 갈대로 뒤덮여 길과 수렁을 분간키 어려웠다.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조광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갈대가 뒤덮인 늪과 구덩이 천지였다. 그는 기마의 우세를 빌려 진창의 늪을 신속히 빠져나갔다. 작전에서 조광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신속성이었다.

그는 보병을 뒤로 제치고 기마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전진했다. 예기치 못한 전술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작전술인 만큼 그는 청구의 남당군에게 불의에 타격을 안겨주려 했다. 선봉(先鋒)에 선 그는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수군보다 60리(里)나 빨리 달려 먼저 청구에 당도했다.

청구의 남당주장 진승소는 갑자기 나타난 후주군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기마병을 이끌고 돌격해 온 조광윤은 남당군을 격파하고 주장 진승소를 생포했다. 그리고 함대 300척을 노획하고 7천여 명을 생포했다. 회하에 있는 남당의 전투함대는 전부 소실되고 수군은 전멸되었다.

청구에서의 승전은 이번 전쟁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부터 후주군은 회남에서 파죽지세로 적을 무찔렀다. 남당의 양주수비군은 이 소식을 듣자 강북으로 도주했다. 세종은 회하(淮河)와 장강(長江)을 연결시키는 운하(運河)를 파도록 명하여 수백 척의 거대한 함대가 장강에 들어가도록 했다. 이 신기한 행동에 대해 남당은 경악했다.

 

9. 초주성(楚州城) 함락과 남당의 강북 땅 획득

 

청구전투에 이어서 후주군대는 초주성을 공략했으나 40여일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958년(세종5) 1월 23일, 세종과 조광윤은 초주에 당도해 성 밑에 주둔했다. 세종이 직접 독전하고 조광윤이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했다.

남당 초주방어사 장언경(張彦卿)과 도감(都監) 정소업(鄭昭業)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활과 창이 다 떨어지자 장언경은 침대를 들고 싸우다가 죽고 그 장병들은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1월 25일, 마침내 후주군이 초주를 함락했다. 이리하여 남당의 강북 점유지는 노주(盧州), 서주(舒州), 기주(蘄州), 황주(黃州) 네 개 성만 남게 되었다.

 

남당왕 이경은 후주 세종이 이미 장강 기슭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강하여 남하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이경은 하는 수 없이 항복하기로 결정했지만, 제왕(帝王)에서 일개 속국의 신하로 강등된 것이 부끄러워, 병부시랑 진각(陳覺)을 보내 상주문을 올려 태자 이홍익(李弘翼)에게 양위하고 태자가 후주의 명령에 복종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진각이 세종의 주둔지에 와서 사뭇 비애에 차 있는 상주문을 올렸다.

「강을 건너 사람을 보내 상주문을 올리며, 노주, 서주, 기주, 황주 네 개 주의 땅을 헌납하며, 남당은 장강을 경계선으로 휴전할 것을 간절히 요청합니다.」
후주 세종이 말했다.
「짐(朕)의 군사가 회남에 온 것은 단지 강북의 땅을 차지하기 위함이오. 남당왕이 온 나라와 함께 귀속했는데 짐(朕)이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진각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의 뜻을 표하고 돌아갔다. 후주는 3차에 걸친 회남출정에서 남당의 14개 주를 획득함으로써, 장강(長江) 이북의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고 남당과의 분계선은 회하에서 장강으로 옮겨졌다.
이번 세종의 3차 회남출정에서 처음 주장으로 나선 조광윤은 천하무쌍의 용맹함과 뛰어난 군사전략으로 호주성, 사주성, 청구, 초주성 싸움에서 연달아 초인적 군사전술로 매번 승전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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