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전통에 따라 후주에서는 황제가 출정할 때에는 변경(汴京)에 주둔하고 있는 위수부대(衛戍部隊)인 금군(禁軍)을 통솔하게 된다. 금군은 전전사(殿前司), 시위친군마군사(侍衛親軍馬軍司), 시위친군보군사(侍衛親軍步軍司) 등 3개 부대로 나눠지는데, 방대한 병력을 지닌 금군은 수도 방위임무를 수행하게 되므로 황제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북한왕 유숭에 대한 출정을 거친 세종은 중대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군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군대정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세종은 처리해야 할 정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 군대정비의 중대사를 고평전투에서 용맹과 지략을 떨친 전전도우후(殿前都虞侯)로 갓 승진한 조광윤에게 맡기기로 했다. 군대 정비와 개혁의 모든 결정권은 조광윤에게 있었던 만큼 장군과 병사들의 선발여부는 그가 직접 결정했다. 말단 병사로부터 도우후 이하의 각급 장군을 맡은 경험이 있는 조광윤은 오대(五代)시기의 군대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로는 당시 후주의 군대는 노병과 소년병들로 구성되어 군대구실을 제대로 못하다보니 여러 번 패전의 위기를 맞곤 했다. 조광윤은 “강대한 군대의 요체는 정예군을 키우는데 있다.”는 이치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는 이번 군 정비를 통해 노약자와 겁쟁이들은 모두 퇴출시키고, 강건한 자들을 선정하여 ‘상졸(上卒)’로 하며, 우수한 자는 금군에 배치하여 직접 황제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번 군대정비를 통해 전부터 내려오던 폐단을 말끔히 없애고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군대정비 후 군 검열을 실시할 때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병사는 수적인 것보다 우수성이 중요하다. 어떻게 백성의 혈세로 무용지물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이후부터 후주의 군사력은 크게 강대해져 출정할 때마다 승전보를 전했다. 군대정비 다음으로 조광윤이 해결할 과제는 교만하고 횡포한 장병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무인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무인정권이 난립하던 오대시기에 군대구성원은 매우 복잡했다. 또 전쟁이 빈번하고 정권이 수시로 교체되는 상황에서 공을 세운 교만한 장병들을 통제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들은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병란(兵亂)을 일으켜 황제의 생명을 위협했다. 고평전투 이후, 세종이 번애능, 하휘 등 고위장군들을 사형에 처한 이후부터 이들은 감히 횡포를 부리지 못했다.
조광윤이 실시한 군대정비의 또 하나의 주요한 내용은 전국의 도적무리를 징집해 훈련시켜 정예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오대회요(五代會要)』를 읽으면서 용맹한 자들이 대부분 다른 나라에 몰려가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천하호걸들을 징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막(草幕)에 있든 산야에 있든 간에 용맹한 자면 누구나 금군에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후주군은 강성해지고 용맹한 군사들이 집결함으로써 중국통일대업을 이루려는 세종에게 힘을 모아주었다. 군대정비의 중요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 조광윤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군사전략 면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과시하게 되었다. 그가 제창한 “약자는 도태하고 강자로 충당하며, 군대는 우수성이 중요하다.”, “교만하고 횡포한 자를 제거하고 군기를 엄수한다.”, “호걸을 널리 징모하고 초야를 가리지 않는다.” 등의 방침은 후주군 정예화의 기본노선을 확립했고, 군대정비로 전투력을 크게 증강시켜 후주가 오대시기에 가장 강성한 왕조로 태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