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윤이 태어나서 7세까지의 어린 시절은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재위하던 시기였다. 당시 후당은 상당히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안정된 시기여서 전쟁이 없었다. 전통적인 관료가문에서 태어난 조광윤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 두씨에게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세 명의 선생에게 유가경전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유가경전(儒家經典) 공부보다는 병정놀이와 무예 익히기를 좋아해서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썩 모범적인 아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1. 세 명의 은사(恩師)
소년 조광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선생은 진학구(陳學究), 조학구(趙學究), 신문열(辛文悅) 등 모두 세 명이다. 여기에서 ‘학구(學究)’란 서당 또는 사숙(私塾)의 선생을 말한다. 세 명의 선생 중 진학구와 신문열은 서당의 선생이었고, 조학구는 ‘가숙(家塾)’의 선생으로 오늘날의 가정교사에 해당한다.『손공담포(孫公談圃)』에는 ‘진학구’가 낙양의 협마영 앞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버지 조홍은이 조광윤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가서 입학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조광윤은 남들이 자기보다 앞서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유가경전을 배우는 공부보다는 무예연마를 좋아했기 때문에 진학구는 늘 그를 엄하게 훈계했다고 한다. 조광윤은 진학구의 엄격한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고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서당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대오를 갖추어 행진하게 하며 병정놀이를 즐겼다고 하는데, 문(文)보다는 무(武)를 좋아하는 조광윤과 완고한 유학자로서의 진학구는 성격상으로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 같다.
후일 조광윤이 11세가 될 무렵 가족들이 아버지를 따라 변경(汴京)으로 이사한 뒤에는 조학구가 문객(門客)이 되어 가정교사를 맡았다. 이때 조광윤의 어머니 두씨는 낙양시절의 일을 생각해 진학구도 다시 불러들였지만, 조광윤은 진학구보다 조학구를 더 따랐으며 그가 황제가 된 다음에도 진학구는 진주(陳州)의 시골마을에서 예전처럼 어렵게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의 동생 조광의가 변경윤(汴京尹)이 되어 진학구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변경으로 부르자 송태조 조광윤이 무척 화를 내서 다시 진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가는 도중에 도적무리를 만나 조광의가 준 여비마저 빼앗기고, 진주에서는 학생 수도 점점 줄어들어 말년에는 임시 역사(驛舍) 안에서 기거할 정도로 불우하게 보냈다고 한다.
조학구에 대하여는 『손공담포』에서 후일 조광윤을 황제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재상 조보(趙普)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보는 조광윤보다 다섯 살 밖에 많지 않았고, 노장(老將) 유사(劉詞)의 참모로 있던 조보는 유사가 죽은 후 956년 조광윤이 남당(南唐)의 저주(滁州)를 함락하자 저주(滁州)의 군사판관(軍事判官)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그때 임시로 저주를 수비하고 있던 장군 조광윤이 조보를 처음 만났다. 따라서 조보가 그 보다 19년 전인 937년에 그의 가정교사였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조보가 조광윤의 동생인 조광의(趙光義), 조광미(趙光美)나 그의 아들 조덕소(趙德昭)의 가정교사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