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 박사의 열정과 불굴의 개척정신은 모든 한국 이민자들의 표상입니다.”
지난 18일 오전(현지 시간) LA한인축제 ‘김진형 박사 광장 현판식’에서 인사말을 한 김현명 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영사가 밝힌 말이다.
또한 지난 2006년 행정학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던 한서대학교는 교내 박물관 안에 남가주 이민역사의 개척자 김진형 박사의 업적을 기린 기념관(100평)을 만들어 최근 개관식을 열었다.
지난 18일 오전(현지 시간) 10시 제41회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9월 21일까지)에서 로스앤젤레스 시장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Olympic Blvd and Vermont Ave, 교착점을 ‘김진형 박사 광장, Dr. Gene Kim Square'으로 하는 현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진형 박사는 “1968년 미국 유학의 꿈을 안고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며 “당시 중국과 일본 타운을 돌아보고 한인동포들의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해 코리아타운 세우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장서 왔다”고 밝혔다.
바로 이렇게 LA 사회에서 한인회의 표상은 물론 그곳 정치인들에게도 추앙을 받고 있는 김진형(81) 행정학명예박사가 궁금했다. 최근 고국을 방문한 그를 지난 8일 저녁 투숙하고 있는 조선호텔에서 만났다.
김 박사는 LA 한인축제를 창시해 지금까지 이어온 사람이다. 지난 18일 열린 41회 LA한인축제에서도 명예위원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국이 어렵게 살 때 외국을 처음 나간 것이 1963년인데, 일본 동경지사 국제관광공사 주재원으로 68년까지 근무했다. 미국 유학으로 사직을 하고 68년도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을 했다. 한국이 상당히 어렵게 살 때이다. 그 때 (불법)이민간 사람들은 한국이 어려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갔기 때문에 다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당시 돈을 벌면 고국에 있는 친척이나 가족에게 보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잘 사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어려울 때 떠난 사람들은 나라 걱정을 많이 했다. 당시 LA에 가니 일본타운과 중국타운이 잘 꾸며져 있고, 멕시칸타운도 있었다. 당시 약소민족들이 타운을 조성해 공동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결해 나간 것을 봤다.”
이어 김 박사는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과 축제에 관한 배경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국은 개인이 활동을 해도 정부와 잘 연결이 안 된다. 그래서 단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무슨 단체를 만들어야 정부하고도 얘기를 할 수 있어, 1972년에 시작한 것이 코리아타운 번영회이다. 바로 코리아타운을 만들기 위한 활동 단체인 셈이다. 당시 불법 인민을 온 한인들은 2세 교육이 중요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2세 교육을 시키려면 1세대가 알아야 공부를 시키는 것인데, 영어도 못하고 노동만 하니까 2세 교육이 안됐다. 그래서 1세대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세대들을 공부시키려고 하니 할 수 있는 방법이 책방이었다. 그래서 72년도에 현재 한인 축제 퍼레이드를 하는 중간지점에 한국서적센터라는 책방(서점)을 냈다. 당시 시사영어사 대표를 만나 돈이 없으니 후불로 내고 1세대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바로 영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당시 차이나타운과 일본타운을 보면서 무료 한글 간판달기운동을 시작했다고도 했다.
“차이나타운, 중국타운 등도 자기들 언어로 간판이 돼 있어, 한국도 한국어로 간판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 간판달기 운동을 시작했다. 68년에 한국 사람들이 5000명 정도 살았는데, 다 흩어져 살다보니 한국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당시 동양 사람들이 지나가면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보면서 차를 태워주고, 집에 데려와 김치찌개, 밥 등을 함께 먹으면서 애기했던 시절이었다. 한글간판달기 운동을 시작하는 도중 영세한 한인 8명을 모아, 코리아타운 번영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상인들의 활동단체인 상인번영회를 생각해 번영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기서 코리아타운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그가 코리아타운 번영회를 만들어 활동할 때 한국 사람들이 애국심이 강해 감동받았다고도 했다.
“나뿐 만 아니라 이민 온 한국 사람들이 애국심이 강했다. 애국심이 저절로 나올 때였다. 제가 조금 앞장서 했을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서예도 했고, 그림도 제법 그렸기 때문에 한글로 간판달기를 시작했다.”
김 박사는 72년도 로스앤젤레스 상점에 무료 간판달기운동을 했던 것이 한인 코리아타운 형성에 일조했다고도 했다.
“영어로만 돼 있는 사회에 한글을 붙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안 되겠다고 생각해 미국 상점에 가 한글간판을 달면 한국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설득해 올림픽가와 버몬트와 웨스턴가에 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글간판이 세워지니 한국 사람들이 찾게 돼 장사도 잘 됐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늘게 돼, 자연스레 한국 사람들을 모이게 되고 한인 타운 형성에 발판을 마련했다.”
한글날(9일)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한글 간판 얘기는 상당히 의미가 있어 보였다. 최초의 한류가 한글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LA지역 정치인들과 친분을 맺게 된 동기도 들려줬고, 그로인해 코리아타운을 만들게 된 이유도 전해줬다. 72년 간판달기운동에 이어 74년 한인 퍼레이드를 시작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미국사람들이 올림픽 주변에 가보니 이상한 간판이 있다고 소문이 나 모이게 됐고, 시간이 지나 74년 11월 3일 퍼레이드를 시작하면서 한인축제가 막을 올렸다. 올해로 41회째를 맞았다. 또한 81년 시의회 법안 통과로 코리아타운으로 명명해 지금에 이르게 됐다. 미국은 지방자치제가 잘 돼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역의 시의원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은 구청장이라는 것이 없다. 시의원이 구청장 역할은 한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정치헌금을 내고 지역 시의원을 사귀게 됐다. 72년 당시 LA 코리아타운지역 담당 시의원 데이비드 커닝햄(David Cunningham)에게 선거자금, 정치자금 등을 주고 친해졌다. 78년에 그에게 한글간판도 많이 달렸는데, 코리아타운이라는 경계를 만들어 달라고 신청을 했다. 데이비드 의원이 81년도에 의회에서 코리아타운 경계를 발의해 통과를 하게 됐다.”
김진형 박사와의 얘기를 듣고 보니 그에게서 로스앤젤레스 이민사가 한눈에 들어온 듯했다. 특히 74년 퍼레이드로 시작한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와 관련한 뒷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물론 미국가기도 힘들었지만 미국에 와도 한국으로 갈수가 없었다. 고향은 그립지만 영주권이 없는 다 불법 체류자였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꼼작 못하고 노동을 하며 살았다. 처음 74년 퍼레이드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와 손으로 흔든 태극기를 2000개를 샀다. 2000명 정도 관객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퍼레이드를 하는 데 순식간에 태극기가 다 없어졌다. 경찰 집계로만 3만 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74년 당시의 퍼레이드와 관련한 뒷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경찰에가 도로허가를 받을 때, 경찰이 몇 명 정도 오느냐고 해 많이 부풀려 3000명 정도 온다고 했다. 74년 11월 3일이 일요일인데,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이민자들이 갈 때가 없으니 생활정보라도 얻으려고 일요일에 다 교회로 모인다. 미국사람들이 오전에 예배를 보면 오후 교회를 빌려 그곳에서 모였다. 예배가 끝나면 3시쯤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오후 3시에 퍼레이드를 시작해 지금도 오후 3시에 한다. 당시 오후 2시가 됐는데도 올림픽 거리에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초초해 망신당하겠구나 생각했는데, 3시 40분정도 되니 모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구름 때처럼 모였다. 3만 명이 모인 것이다. 대형 태극기를 5~6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나가니 한인들이 태극기를 보고 엉엉 울었다. 고향이 그리워서이다. 지금 태극기 지나가도 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74년 로스앤젤레스 첫 한인 퍼레이드 얘기이다.”
당시 첫 퍼레이드에 미국 정치인들이 와 줘야 보기가 좋은데, 좋아하는 데이비드 커밍햄 의원 조차도 오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당시 정치인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첫 퍼레이드에 가 사람도 없는데 망신당할까 봐 안온 것이다. 좋아하는 데이비드 커밍햄 의원도 오지 않았다. 3만 명이 쏟아져 나오니까 다음해 축제에는 정치인들이 한 두명이 왔다. 3회 때부터는 LA시장이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정치인들이 자주 등장했고, 현재는 코리아 퍼레이드를 한다고 하면 정치인들이 서로 오려고 한다. 그만큼 코리아축제가 위상이 높아졌다.”
72년 첫 퍼레이드를 하려고 하니까 반대하는 한인들도 무척 많았다고도 했다.
“특히 언론인들이 반대를 많이 했다. 당시 미국에는 한국 사람만 다니는 학교가 없었다. 한국 사람들만 하는 단체도 없었다. 요즘은 교포수가 많아지니 단체도 생기고 그렇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퍼레이드 한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했다. 퍼레이드를 하려면 보기 좋은 행진대가 지나가야 하는데, 행진대도 없는데 왜 굳이 하려고 하느냐는 반대 의견이었다. 반대한 사람들이 한국을 망신시킨다고 생각했다. 일본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알았던 친구들을 보러 일본타운에 가면 퍼레이드를 했다. 가라대하는 사람들이 100명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가라대하는 사람들이 다 일본사람들이 아니고 흑인, 백인 등 미국인은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끼어있었다. 복장만 일본 가라대 도복이었다. 일본 여자무용단과 북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 다음에는 전부 찬조 출연이었다. 맥시칸 행진, 백인, 흑인 등이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다민족 사회이니까 한국이라고 해 한국 사람들만 모여하면 미국사회에서 배척을 받기 마련이다. 전부 어우러져야만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사회이다. 반대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아무리 강조해도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한국식으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강행을 했다. 내가 번 돈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바로 현재 유명세를 타고 있는 LA한인축제가 만들어진 초창기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연스레 최근 한서대학교 박물관에 설립된 자신의 기념관 개관 얘기로 말을 이어갔다.
“서산에 있는 한서대학교가 로스앤젤레스에 분교를 세울 때 내가 도움을 많이 줬다. 경찰청을 지도 자문을 한 로스앤젤레스 경찰 커미션(경찰청장 자문위원장, 13년 간) 위치에 일을 하고 있을 때 한서대에서 부탁을 하면 해결을 했다. 2006년도 한서대에서 행정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름대로 알아보니 대단한 사람들에게만 명예박사학위를 줬다. 최소한 다른 나라 수상이나 장관 등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주는데, 나에게는 영광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경찰 커미션에 대해 잘 모른다.
미국에서는 대단하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잘 모르니까 한서대 박물관에다 김진형 기념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200장이 넘은 미국 정부 상장, 수많은 한국 정부나 지자체장상, 미국에서 받은 선물, 1800년대 우표, 동전(2센트, 0.5센트) 등 귀중품을 배로 부쳤다. 물론 한인축제 때 LA올림픽 광장에 건 ‘김진형 박사 광장 현판’과 똑같은 현판도 가져와 한서대에 전해줬다. 한서대에서 1억을 투자해 모든 기념품을 볼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다. 최근 한서대 기념관 개관식에 다녀왔다. 한국을 방문한 목적도 기념관 개관 행사에 오기 위해서다.”
이날 인터뷰에는 의형제를 맺고 지낸 이존영 미국 콩코디아국제대학교 부총장도 함께 했다.
김진형 박사는 서울대 문리대 불란서학과를 졸업했고, Pepperdine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1년을 수료했다. 2006년 한서대학교에서 행정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LA 코리아타운 번영회 초대 회장, 퍼레이드 초대 회장, 재미 대한체육회 후원회장, 남가주 호남향우회 명예고문, 로스앤젤레스 경찰청 경찰허가 심사 커미션 커미셔너 등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민국 민주평통 LA 지역협의회 명예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10월 초 고국을 방문해, 기념관 행사, 단양팔경, 건강검진 등의 일정을 보내고 11일 오후 3시 미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