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윤은 또 왕경의 군사와 후촉의 군사역량을 비교분석했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후촉군은 약해서 공격하면 곧 무너질 것으로 보였다. 후촉의 지원군인 이정규의 군사도 왕경의 군사에 비해 약했다. 그나마 병력을 분산시켜 이곳저곳을 방어하고 있었다. 양군(兩軍)을 비교해 보면 왕경의 군대가 더 강하고 승전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또한 지리적 환경에 근거해 왕경과 작전계획을 상의했다. 봉주(鳳州)는 4개 주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므로 4개 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먼저 봉주를 탈취하면 자연 4개 주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고, 진주(秦州)는 남쪽 3개 주의 지원을 잃게 된다. 그러면 진주의 수비군은 공포에 떨게 되고 투지를 상실하여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진주와 봉주가 무너지면 성주(成州)와 계주(階州)는 더 이상 방어할 수 없게 되고 병사들은 성을 팽개치고 도주할 것이 뻔했다. 조광윤은 서부전선을 시찰한 후, 후촉의 4개 주는 곧 정복이 가능할 것으로 아무런 사심이나 편견 없이 조정에 보고했다.
세종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진격명령을 하달했다. 후주 대장군 왕경은 조광윤의 전략에 따라 먼저 봉주를 쳤다. 그는 부장(副將) 장건웅(張建雄)을 파견해 병사 2천명을 이끌고 봉주 북쪽의 황화곡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또 1천명의 군사는 봉현(鳳縣) 북쪽의 당창진으로 가서 후촉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후촉의 천관염원사(天官染院使) 왕란(王鸞)과 후주의 장건웅부대는 황화곡에서 접전을 벌였다.
이때 패배해 당창진으로 도주하던 후촉군은 도중에 후주군을 다시 만나 격파당하고, 왕란은 바로 조광윤과 악연이 있던 동준회에게 생포됐다. 이 전투는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마령(馬嶺)과 백간(白澗)에 있던 후촉부대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줄행랑을 쳤다. 후촉의 대장군 이정규는 청니령(靑泥嶺)으로 후퇴하여 방어했다. 후촉 웅대(雄代)절도사 겸 시중(侍中) 한계훈(韓繼勛)은 진주를 포기하고 도성인 성도(成都)로 도주했다. 후촉 관찰판관(觀察判官) 조비(趙批)는 봉주성(鳳州城)과 함께 항복하고 지원부대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자 성주와 계주는 조광윤이 예측한대로 백기를 들었다.
조광윤은 ‘적약아강(敵弱我强)’의 전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주저 없이 조정에 4개 주의 탈환을 건의함으로써, 후주가 이곳을 수복하는 전쟁에서 비범한 판단능력과 군사전략을 과시했다. 이로써 조광윤은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성격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보통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먼 곳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