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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24-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근

삼층탑과 샘터가 어우러진 기도처로 자리매김

 

(시사1 = 김재필 기자)충북 괴산군에서 분리되어 2003. 08. 30에 개청된 증평군(曾坪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군(郡)으로 철도나 고속도로가 지나가지 않는다(중부고속도로에는 증평IC가 있으나 행정구역은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임).

 

서기 475년에 고구려 금물노군(今勿奴郡) 도서현(道西縣)이었던 이 곳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서기 757년에 도서현(道西縣)을 도서현(都西縣)으로 개칭(신라 경덕왕 16년) 청연현(淸淵縣(또는 청당현 淸에 塘縣)) 설치되어 나서 불교가 급속히 전파되어 지금도 많은 불교유적들이 남아 있다.

폐사지에 있다는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충북 유형문화재 제 197호)을 답사하기 위해 증평을 찾은 때는 내린 눈이 아직 산하를 덮고 있던 겨울 중심인 1월의 끝자락이었다.

 

마애불상군이 있는 곳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청주에서 진천으로 가는 국도에 서 있는 이정표를 보고 작은 농로를 한참이나 들어 왔으나 이정표가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차를 세우고 한참을 기다려 만난 주민에게 물으니 탑바위라는 곳에 있단다. 허나 탑바위도 모르긴 마찬가지...

그 분의 친절한 동행 안내가 없었으면 아마 못 찾았을 것이다.

 

축사앞에 차를 세우고 300여m를 걸어 올라가니 염실마을 뒤로 길게 누워 있는 남대산 기슭에 보호각과 그 옆에 삼층탑이 보인다.

 

‘남하리사지( 南下里寺址)’라는 명칭에 나와 있듯 고려시대 남대산 주변 마을에는 국가에 바칠 무기를 만드는 염곡소(念谷所)가 있었다. 불을 많이 다루어 마을로 퍼지는 화기(火氣)를 막아 화재를 예방할 방법을 모색한 끝에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따라 이곳에 절을 세웠다는데 1993~1994년 충청전문대박물관의 시굴조사에서도 건물지가 확인되고 막새기와·철화백자편 등이 발굴됐다. 자료에 의하면 1954년까지 이어져 온 사찰이 있었단다.

 

마애불상군은 동쪽을 향한 높이 3.5m 너비 4.7m, 두께 3.2m의 암반에 새겨져 있는데 더 이상의 풍화와 침식을 막기 위해 2008년에 설치된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문양이 없는 대좌에 서 있는 높이 3m의 여래상으로 원형의 두광, 소발은 보주형의 육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지그시 감은 눈, 길게 각형(角形)으로 높지 않은 코, 작은 입가엔 고졸한 미소를 띄고 있으며 처음부터 새기지 않았는지 아니면 마모되어 떨어졌는지 귀는 보이지 않고 목은 짧고 삼도도 표현되지 않았다. 당당한 양어깨에 걸친 불의는 통견으로 무릎아래까지만 덮고 있는데 U자형의 의문(衣文)과 수직선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칠부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인다.

 

좌측의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10cm, 우측의 협시보살은 32cm로 본존불과의 거리비례가 맞지않게 새겨져 있어 균형 감각이 떨어져 보이는데 우협시보살상은 무릎 이하는 미완성인지 마모가 심해서인지 불의나 대좌 모양이 보이지 않는다.

 

본존불이 새겨진 암벽 우측엔 삼각형 모양의 바위가 북쪽을 향해 붙어 있는데 마모가 심해 언뜻보면 울퉁불퉁한 거친 면으로만 보이는데,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광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오른손을 턱에 괴고 상체를 15도 정도 앞으로 숙인 상태의 윤곽선과 좌의 복련판 5엽이 희미하게 보이는 걸로 보아 반가사유상인가 보다.

 

이 곳 반가사유상도 대개의 마애불에서 본 것 같이 솜씨가 서툰 석공의 작품이라기보다 동네 아저씨의 어눌하고 코믹하게 그린 그림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으나 나는 마애불을 관찰하기에 앞서 안내판을 먼저 보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모가 심하게 된 바위에서 반가사유상을 찾고 나서 안내판을 읽어 보니 반가사유상이 있다고 씌여 있어 반가웠다.

 

다시 본존불과 직각으로 꺽어진 우측으로 나 있는 0.5m의 좁은 통로(석실)에 들어가 봤다. 남쪽면에 독존(獨存)으로 새겨진 높이 2.5m의 여래입상은 촬영거리가 짧아 초광각렌즈를 사용하여 촬영할 수 밖에 없었다.

 

정강이 아래는 땅속에 묻혀 있으며 전체적으로 선각의 상태가 희미하다. 얼굴은 삼존불과 유사하고 불의는 우견편단으로 가슴 앞에는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내려진 옷주름선이 굵게 나타나 있다. 수인은 양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한 듯하나 이 역시 마멸이 심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곳을 나와 삼존불을 중심으로 전체를 찬찬히 살펴보니 본존불 하단에 사각형의 마른 샘터가 보인다.

 

마애불앞에 샘터라니..? 아마 이곳에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도처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며 마침 30여년동안 매달 천안에서 이 곳에 기도하러 오신다는 옆에 분에게 물어보니 4년전까지만 해도 물이 솟아 나왔다는데 농수로 정비공사 후 안 나온다고 하니 아마 공사로 인해 수맥이 끊겼는가 보다.

 

가로 93cm 세로 67cm 깊이는 50cm 정도의 크기로 아랫마을 사람들이 약수로도 사용했으며 예불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다른 공양물과 함께 공양수로도 사용했다는 이 샘물. 이제 마애부처님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마애불상군에서 20여미터 위치한 곳에 넓직한 바위를 기단석으로 서 있는 삼층탑(충북 유형문화재 141호)이 있다.

아랫마을 사람들이 이 곳을 탑바위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제 알게 됐다. 이 삼층탑과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를 일컬어 그렇게 불러왔나 보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탑신의 1·3층 몸돌은 각각 한 돌로 되어있고, 2층 몸돌은 1층 지붕돌과 한 돌로 조성되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높게 새긴 점이 특징적인데, 네 귀퉁이의 치켜 올림과 잘 어울려 안정감을 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탑을 보고 있노라니 한 분이 다가와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라면서 삼층탑 밑에 왕건바위가 있다 해서 따라가 봤다. 왕건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바위를 주먹으로 치니 움뿍 패였다는 바위가 삶은 계란을 반토막 내어 노른자를 파낸 것처럼 우묵하게 반구(半球)의 모양으로 돼 있다. 옛 위인들이나 왕들의 무용담 같은 전설이 이 작은 바위에까지 남아 있는게 신기하다.

 

다시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니 뒤에 큰 암반과 마애불이 새겨진 앞의 암반이 30-50cm정도 떨어져 석실을 이루었다. 삼존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반가사유상, 왼쪽 통로면에 여래입상등 총 5구가 새겨져 있어 불상군을 이루고 있으며, 절터가 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또한 커다란 암반이 어우러져 자연적인 석실형태를 이루고 있는 전체 모습이나 삼존상, 독존의 편단우견 여래입상, 그리고 반가사유상 등으로 구성된 마애불상군의 도상 조합, 그리고 조각양식의 어눌함 등이 경주 단석산 답사시 에서 본 ‘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 199호)’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다.

 

통일신라~고려초(9~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마애불상군은 1998년 12월 31일에 충북 유형문화재 제 197호로 지정되었는데 증평군에서는 2017년부터 충북도 유형문화재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한 분이 가져온 공양물을 삼존불 아래에 펼쳐 놓고 기도를 하신다.

무엇이 이 분들을 천안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인도하여 깊은 불심을 심어 주었을까?

본존불 뒤 바위에 호랑이가(바위에 얕게 새겨진 것인지 바위의 천연적인 무늬인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내려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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