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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31-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고려 국왕 예종의 효심이 새겨진 마애불

(시사1 = 김재필 기자) 태풍이 지나간 9월초의 날씨는 대지에 초록물감을 진하게 뿌려놓은 듯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이하 마애불로 칭함)이 위치한 금원산에 가는 길은 상쾌하다.

대구에서 지인의 승용차로 1시간 20여분을 달리니 금원산 휴양림 입구에 도달한다. 주차후 매표소에서 받은 안내지도를 보니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와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를 경계 하는 금원산(1,353m)은 주위의 기백산(1,331m)과 현성산(960m)이 함께 3형제처럼 삼각형으로 위치해 있다.

금원산은 옛날 금원숭이가 첩방지축으로 날뛰는 바람에 한 도승이 이곳 바위 속에 가두었는데 그 바위가 원숭이 얼굴처럼 생겨 낯바위라 부르다가, 음이 바뀌어 납바위가 되고 이런 전설로 금원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니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는 성인골(聖人谷) 유안청(儒案廳)폭포와 자운폭포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온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서 감음현을 식읍으로 받아 살았던 이정공 서문기(理政公 西門記)의 유허지로 그 자손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전해지는 지장암이었던 지재미골로 마애불이 있는 가섭암지는 여기서부터 1km 정도 올라간다.

두 여울(개천)의 징검다리를 건너 800미터 정도를 오르니 높이가 4층 건물보다 높게 보이고 둘레가 150여m 정도 되는 문바위(門岩)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는 단일 바위로는 국내 최대의 바위로 전에는 가섭암 앞에서 일주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바위 앞에 서니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어 절로 경건해진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바위신앙이 널리 퍼졌던 옛날엔 이곳 주민들은 신령스런 이 바위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을 것이다.

바위 앞면에는 고려 말 판서를 충신인 달암 이원달 선생이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이원달 선생을 기려 '달암 이선생 순절동(達岩 李先生 殉節洞)'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순절암·두문암이라고도 부른다.

 

구한말 애국지사 면우 곽종석도 문바위에 글을 남겼다.

瀛濱秀石費神鐫 시냇가에 우뚝 솟은 바위 돌은 신의 도끼로 다듬은 듯하네

頂載寒松更可憐 머리 위에 소나무 자라니 더욱 정을 끄누나.

雨看無愧日蒼然 저처럼 부끄럼 없이 푸르게 살아가리라.

 

문바위를 지나니 오른쪽에 지어진 관리소가 보이고 왼쪽 돌계단을 오르니

약 80여평 정도의 평탄지와 석축 일부만 남아 있는 가섭암지(迦葉庵址)가 나타난다.

이곳은 듬성듬성 잡초만 자라고 있는 나대지로 가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마애불 석굴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영조 46년인 18세기 후반에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1711~1775] 그린 가섭암(영남기행화첩에 수록)의 전경이 보인다. 2×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 1동과 담장과 문이 있는 소규모 암자로 그려져 있어 암자의 규모와 170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걸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곳에 세워져 있던 삼층탑은 1970년대초에 가까운 위천초등학교로 옮겼다는데 1999년과 2004년 두 차례나 도난되었던 걸 회수하여 2007년에 거창 박물관하여 관리중이다.

 

‘가섭암’이라는 암자 이름도 특이하다.  우리나라에 가섭사는 충북 음성에도 있다.

불교를 안 믿는 사람도 <염화미소(拈華微笑)>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아무도 그 뜻을 몰랐으나 수제자인 가섭(迦葉)만이 미소지었다”는 고사(古事)로 말이나 글로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소통을 한다는 뜻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 곳 가섭암에서는 불상만 봐도 가섭처럼 부처의 뜻을 알 수 있을 수 있는 가람이라는 뜻일까?

 

마애불은 15여미터의 양쪽의 바위벽 사이의 계단으로 올라 큰 바위가 얹혀 있는 자연석굴에 있다. 들어가는 길은 처음보다 점점 좁아져서 사람의 인체에 비하면 양 허벅지 사이 끝에 자리한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의 자궁속에 들어가는 묘한 기분이 드는 건 마애불의 조성 경위를 알고 나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연 석굴에 들어가니 20여명이 참배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입구 오른쪽에 정서방향에서 약간 북쪽을 향해 직립한 암벽에 바위틈으로 흘러 내리는 빗물을 차단시키 위해 모양으로 물길을 파고 그 밑에 높이 3m 폭 2m정도 크기로 음각하여 배(舟) 모양의 광배(光背)를 표현하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 입상을 고식(古式)이지만 평면적으로 얕게 새겼다.

 

석굴안은 좀 습하고 어두운편이나 입구와 위 바위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마애불에 실루엣이 생겨 입체적으로 보인다.

1,000여년이 지났어도 침식되거나 마모된 부분이 없는 것은 비바람을 피해 석굴에 조성한 때문이리라.

 

고려 16대 국왕인 예종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풍수지리에 밝은 신하를 시켜 전국의 산천을 답사하여 어머니의 자궁처럼 보이는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이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면 나의 생각이 무리일까?

예종은 백중인 우란분절에도 아버지인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를 하며 법회를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 보아 효심이 지극했던 것 같다.

 

가운데의 본존불은 둔중하고 토속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두상은 소발로 육계는 비교적 큰 편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대부분의 두광은 원형인데 비해 양각으로 새긴 무늬 없는 촛불(불꽃)모양 이다.

촛불모양을 보주형 두광이라 하는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에도 표현되어 있으나 거의 원형에 가까워 쉽게 알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촛불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종교의례에 촛불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촛불은 신과 인간의 만남의 장에서 항상 등장 한다.

조성자는 어두운 석굴을 밝히는 한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반야용선을 타고 피안을 건너 극락왕생을 하시길 발원한 것이리라.

 

본존불은 평면적인 얼굴에 코는 삼각형으로 뭉툭하며, 눈두덩은 두툼하고 감은 듯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작은 입은 다물어 굳은 인상을 준다, 납작한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볼륨이 약한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의로 간결한 옷주름이 겹쳐 음각선묘로 표현 되었다. 옷의 길이는 칠부로 가는 다리가 노출되었고 양쪽 발은 특이하게도 발꿈치를 서로 맞댄 채 발끝을 양쪽으로 벌리고 기단이 있는 5개의 연잎이 새겨진 4각 대좌 위에 서 있다. 대좌 안에도 3개의 연잎이 새겨져 있다.

양손은 가슴까지 올려 양손의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상은 본존불상과 대조적으로 양각으로 표현였으며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본존불보다 여성적이고 어깨의 표현도 부드러운 곡선을 하고 있다. 두광은 원형이고 눈,코,입은 본존불과 같은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천의(天衣)는 목걸이, 구슬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양옆 가장자리를 새의 깃털 (또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모양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거창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보물.국립중앙박물관 소장)등과 같은 양식으로 주로 6세게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고식이다

좌협시보살은 오른손을 가슴앞으로 올리고 왼손은 허벅지 아래로 내려 천의 자락을 잡고 있고, 우협시보살은 왼손을 가슴앞으로 올리고 오른손은 허벅지 아래로 내려 천의 자락을 잡고 있어 두 보살이 대칭을 이루어 뽀족하고 작은 연잎이 복련으로 새겨진 둥근 대좌 위에 서 있다.

이러한 양식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표현으로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형식적이고 도식화 된 점이 있다.

 

좌협시보살좌측인 입구측에는 가로 70㎝, 세로 88㎝ 크기로 음각된 판에 조상기를 기록한 판이 있으나 마모가 심해 식별하기가 어렵다.

1989년 동국 대학교 학술 조사단이 조사하여 해서체로 1행 26자 총21행에 540여 자가 음각되었음을 알아냈는데 이 중에 판독 가능한 글자는 120여 자로 ‘천경원년십월(天慶元年十月)’이라는 불상 조성 연대가 확인되었다.

이는 고려 예종 6년, 서기로는 1111년이다.

또 내용중에 “왕(王)”, “욕보(欲報)”,“염망모이○은(念亡母以○恩)” 등의 구절이 확인되어 고려 국왕 예종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이 마애불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걸 추정할 수 있다.

 

이 마애불은 1971년 7월 7일 보물 제530호 가섭암지마애삼존불상(迦葉庵址磨崖三尊佛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답사를 마치고 잠시 참배객 틈에 끼어 마애불을 바라보며 합장하고 있는데 금원산 등산객 서너명이 들어오더니 나이 어린 청년이 “와~ 우주인 같은 부처님이네”하며 탄성을 지른다.

그는 본존불위 촛불모양의 보주형 두광과 양협시보살의 지느러미 모양의 천의에서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오전을 지나는 시각이 되니 입구에서부터 서서히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슴프레 빛을 받은 마애불을 보니 등산객의 말처럼 우주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마애불과의 대화를 통해 당시의 종교, 문화, 생활상등을 나누고 있다는 걸 느낀다.

 

석굴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생전의 어머니 모습이 앞산에 오버랩 되어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신다. 그렇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영원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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