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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27-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기도처 북한산 승가사에 위치

(시사1 = 김재필 기자) ‘바윗돌을 다루는 솜씨야말로 조금만 건드리면 그대로 앵돌아질 찬란한 웃음 지긋이 눌러담아 구김살 하나 없이 저렇게 너구러워 판옥같은 얼굴이 달덩이처럼 선연히 솟아올랐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꽃판에 앉으신 석가여래부처님 무릎위에 안기어 잠들었으면 도도록한 주르륵 젖이 솟아 입으로 흐르려니 배고픈줄 모르고 한 시름 잊을래’

- 승가사에서 부분 -

 

어릴 적부터 최남선, 오세창 등에게 한학을 사사, 동양인의 서정세계를 동양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특이한 시풍을 이룩한 김관식 (1934~1970)이 20대초에 비구니들만 있는 사찰을 방문하고 지은 시 <승가사에서>의 부분이다.

 

승가사는 북한산에 있는 비봉능선의 사모바위와 문수봉 사이에 있는 승가봉(해발 567m) 아래에 위치해 있다. 승가봉이란 이름도 승가사(僧伽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시대 756년(경덕왕 15년)에 낭적사의 수태(秀台)가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 와서는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수하고, 1090년(선종 7)에 영현(領賢)이 중수하였다. 1099년(숙종 4)에는 의천(義天)이 불당을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과 소헌왕후가 병들었을 때 왕실의 구병기도가 행해졌으며, 세종의 생일날에도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수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1422년(세종 4)에 7종을 합하여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선종에 속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불교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렇듯 승가사는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하에서도 500년 내내 왕실의 대표적인 기도처로 이용 되었다.

 

이후 6·25전쟁으로 불에 타 크게 망가진 것을 1957년에 도명(道明)스님이 대웅전과 약사전등의 당우를 짓고, 1970년초부터 주석했던 상륜(相侖)스님(1929~2007) 산신각,향로각, 동종각, 범종각, 9층탑, 요사채등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1927년경에 쓰인 ‘봉은사본말사지’에는 조선이 개국 후 한양으로 천도할 때 무학대사가 한양을 둘러싼 동서남북 네 곳의 사찰을 비보사찰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한다.

 

내용을 보면 동쪽의 청련사(무학동. 2009년에 경기도 양주로 이전), 서쪽의 백련사, 남쪽의 삼막사(안양), 북쪽의 승가사로 동서남북 사방의 성스러운 상징물이 하나의 공간을 수호하고 나아가 그 공간에 미치는 우주의 기운을 청정하게 에워싸는 만다라의 의미를 한양에 담았다는 것이다.

 

오월의 봄을 맞이한 승가사 가는 길은 구기동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신록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북 5도청 주차자장에 차를 주차 하고 승가사 가는 비탈진 길을 1시간 정도 걷다보니 <삼각산 승가사>라고 쓴 현판이 달린 일주문이 보인다. 산문에 들어 선 것이다.

 

이 곳까지 오면서 버리지 못했던 속세의 모든 근심과 생각의 어지러움을 일주문 앞에 버리고 조용히 한 발짝씩 들어서 본다.

 

일주문을 경계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나누어지는 것인즉 허나 어찌 이런 경계로만 나뉘어질 것인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으니 내가 음지에 있어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양지에 있어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간과 출세간을 나눈들 무엇하겠는가?

지옥과 극락이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아직도 무구(無垢)하지 못한 중생이거늘..

 

승가사는 비구니(여승) 상주하는 사찰이다. 전엔 비구승도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를 있지 못하고 떠나버리거나 파계를 했다는데, 그에 대한 전설이 재미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승가사 왼쪽 능선에 좌청룡의 형상이 나부반와인(裸婦半臥人像)이라서 비구승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정진기도를 흐트러지게 하여 결국은 사찰을 떠나게 했다는 것이다.

 

일주문을 통과하여 청운교라는 계단을 올라가니 ‘민족통일호국탑’이라고 불리는 높이 25m의 9층 석탑에 다다른다. 잠시 숨을 고르려고 앞을 보니 멀리 북악산 자라과 인왕산 넘어로 서울 도심이 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5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은 대웅전 뒤편으로 108개의 가파른 계단위에 15여m의 큰 화강암에 높이 5.94m 너비 5.04m의 대형으로 결가부좌를 하고 복련을 아래위로 배치한 양련으로 새긴 7장의 아름다운 연꽃무늬의 좌대 위에 위엄있고 당당하게 불격(佛格)을 갖추고 앉아 서울의 남쪽을 아니 사바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 보는 이를 압도 한다.

 

지난 번에 답사했던 삼천사 마애여래입상이 선각으로 조성되어 다분히 회화적이라면, 구기동마애여래좌상은 상대적으로 입체성이 두드러진 조형적이라 할 수 있다.

 

불두는 입체감 있게 조각됐는데 머리 위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진 팔각의 천개(天蓋)를 직접 얹지 않고 별도의 돌에 새겨 바위벽에 끼워 넣어 차양 역할을 하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있고 얼굴은 후덕한 아낙의 그 것처럼 사각형에 가깝도록 퉁퉁하며, 아치형의 짙은 눈썹과 아래로 지긋히 감은 듯한 눈, 우묵한 코, 사바세계 중생들의 소리를 모두 들을 것 같은 장대한 귀가 고려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내고 눈꼬리나 입술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긴다. 목의 삼도는 얕은 새김선으로 표현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으며, 왼팔에 새겨진 옷주름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성이 엿보인다. 손은 왼손을 배부분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고 있는 모습이고, 불신은 복련의 7개가 연꽃이 양련으로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대좌(臺座)에 앉아 있다.

 

법의(法衣)에 대해선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의 글을 빌려 본다. 그는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에서 “우견편단으로 입은 대의 끝단이 띠 모양을 이루고 어깨 쪽에서 몇 가닥 주름이 내려오는 점, 왼쪽 팔 위 대의주름이 상박부에서 수직으로 내려와 팔목 부분에서 띠를 이루는 점이 일치”한다고 봤다.

 

최 교수는 “비례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도상 면에서 석굴암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설명하며 “5m에 이르는 상의 규모로 볼 때 왕실과 같은 막강한 세력이 배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 시대 마애불상보다 다소 둔화 되고 형식화된 감은 있으나 신체가 비례감이 좋으며 얼굴 표정 또한 부드러움과 자비로움이 잘 표현된 조각 솜씨로 인해 예술성이 뛰어난 것으로 조각의 섬세함과 아름다운 외모로 치자면 경주 석굴암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이나 8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의 보원사 절터에서 출토된 철불좌상과 함께 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는 이 마애불을 고려초기 불상으로 보고 고려 조각으로서는 신라 것에 비등할 만한 우수작이라 했으며, 월북 미술가 김용준은 1947년 12월 14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눈썹과 눈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다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얼굴 모양의 턱이 꽉 받치고 원만 후덕하고 복스러운 맛이라든지 의복과 가부좌의 자세며 팔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을 들어 틀림없는 신라의 조각임을 주장하였다고 하나 문화재청의 등록 내용엔 고려초기 10세기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천여년 동안 북한산에서 인간들이 사는 역사의 부침을 보며 차안의 세계를 어떻게 느꼈을까?

이러한 마애여래좌상은 1968년 1.21사태 때 총탄에 맞는 아픔도 당해야 했다. 파주 임진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잠입해 들어와 있던 김신조 등 32명의 무장간첩들은 마애불 뒤편 바위 밑에 숨었다.

이에 군경이 이 일대를 물샐틈 없이 수색하며 치열한 소탕 작전을 수행하는중 기관총을 쏜 탄흔이 마애여래좌상의 얼굴과 가슴 부위에 남아 보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얼굴에서도 균열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당시 화강암을 고른 눈썰미(안목)나 높은 암벽에 줄을 매달고 바위에서 부처를 불러 낸 석수쟁이의 예술적인 불의(佛意)에 대한 열정이 수미산을 뚫고 있음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마애불이 조성되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방에서 함께 모여 개개인이 무위의 법을 배운다. 이곳이 부처를 뽑는 장소며 마음이 공하여 급제하여 돌아간다(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라고 방거사가 선요(禪要)에서 설하였다.

인연따라 나툰다는 부처가 북한산이면 어떻고 한강이면 어떠랴.

항아사 같은 우주법계에서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불심경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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