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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22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민간신앙과 미륵신앙을 구현한 여래

 

(시사1 = 김재필 기자) 영주 가흥동 마애불을 답사를 마치고 영주에 사는 지인(시인)의 안내를 받아 대구로 향하는 5번국도를 타고, 안동쪽으로 자동차로 30여분을 달리니 왼쪽에 넓은 공원이 보인다. 솔씨공원이 있는 제비원이다.

 

옛날에 경상도에서 충청도나 경기도로 갈 때 안동을 지나 소백산맥을 넘기전의 길목으로 제비원의 명칭에서 '원'은 길손들이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을 뜻한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기 위하여 교통 요지에 있는 사찰을 국가적인 차원의 숙소인 ‘원(院)’으로 지정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제비원은 청송의 주산지와 절골과 함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김기덕 감독)”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어렸을 때 나는 민요를 자주 들었는데 김세레나의 ‘성주풀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때는 어린 소견으로 이 노래가 경상북도 성주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동 제비원이 성주풀이의 근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후였다.

 

시 성주풀의 설화는 이렇다. 하늘나라 천궁(天宮)에 살았던 성주가 하늘에서 죄를 짓고 지상에 유배됐다. 성주는 강남 갔다 돌아오던 제비를 따라 경북 안동 땅 제비원에 이르러 솔씨를 받아 산천에 뿌렸다. 그 솔이 자라 재목감이 되자 성주는 자손번창과 부귀공명을 누리게 해줄 성주목을 골라 집을 지었다.

 

집안의 무사태평을 빌고, 집을 새로 지었거나 이사를 했을 때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굿을 벌였다. 이 때 무당이 부르던 무가(巫歌)가 민간에 퍼져 민요화된 것이 '성주풀이'이다.

 

"…성주야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원이 본이 되야

제비원에다 솔씨 받어 동문 산에다 던졌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밤이며는 이슬 맞고 낮이며는 볕에 쐬어

청장목(靑長木) 황장목(黃長木) 도리 지둥이 다 되었구나

에라 만수 에라 대신 대활령으로 설설이 내리소서…“

- 성주풀이 中 -

 

이 성주풀이에는 우리나라의 나무 중에서 유일하게 소나무의 탄생설화가 나온다. 안동 제비원이 전국에 씨를 흩뿌린 솔씨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안동에는 유서 깊은 목조건물들이 많다. 1999년에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녀 갔다는 봉정사의 대웅전(국보 제 311호) 극락전(국보 제 15호)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 18호), 최초로 전통 혼례를 올린다고 촬영 의뢰를 받아 찾아 갔던 임청각(보물 182호)등이 이지역에 좋은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것과 무관치 않은가 보다.

 

또한 안동의 제비원이 비롯한 주변이 민족신앙의 성지라 불리는 이유도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성주풀이 곡조와 가사는 모두 제각각이나 표현은 좀 다르지만 공통으로 들어가는 가사인 '성주의 본향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레라' 이라는 내용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찾던 보물 115호인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림)은 솔씨공원과 연미사 사이에 있는 큰 바위에 우뚝 서 있다.

 

높이 9.95m, 너비 7.2m의 암벽에 얕은 부조로 불신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2.43m 높이의 불두를 별도로 조각해 올려놓았다.

이러한 예는 집(고양시)에서 가까운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98호)’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불두와 다른 점은 여러개의 석재를 쌓아 올려 조성하였다는 점이다. 전체 높이도 12.38m로 고려시대의 다른 마애불처럼 신체 비례가 맞지 않는 거불 양식이다.

 

머리의 뒷부분은 평면의 자연석을 그대로 두고 앞면만 얼굴을 조각하였는데 육계(肉髻)의 중앙이 높게 솟아 뚜렷하고, 얼굴은 길게 뻗은 눈과 보는 각도에 달리 보이는 야무지고 두터운 입술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졌으며 양쪽 어깨에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U’자형 주름이 잡혀 있다. 오른쪽 가슴 아래쪽으로는 법의 자락을 한 쪽으로 모아 주름이 잘게 잡혀 있다. 허리부터 다리 아래까지 반원에 가까운 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중지와 약지를 구부려 엄지와 닿은 모습이다. 왼손은 가슴 위로 올렸는데, 역시 엄지와 중지, 약지가 닿은 선명하게 보이는 수인이다.

 

솔밭에서 한참을 올려다 보며 촬영을 해 본다. 렌즈(동행한 시인은 나를 일컬어 ‘푸른렌즈’라 한다)속으로 들어온 전체적인 상호를 보니 인자해 보이는 눈매와 두터운 입술, 잔잔한 미소를 띠는 표정으로 다가가는 대중에게 친근감을 준다.

 

인상에서 풍기는 적절한 표현은 유홍준 교수(명지대학교 석좌교수)의 글을 인용하겠다. 그는 저서에서 ”이 불상에는 자비롭고, 원만하고, 근엄한 절대자가 아니라 주술성 조차 느껴지는 샤먼의 전통이 살아 있다.

 

어떤 때 보면 옛 제비원 주막에 계셨을 주모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떤 때 보면 산신 사당을 지키는 무녀 같기도 하다.이를 미술사적으로 풀이하면 파격적이고 도전적이며 지방적 성격을 강조한 전형적인 고려불상인 것이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 115p)“

 

불교미술 사학자 황수영 박사(1918년 ~ 2011년)는 답사시 11세기에 조성 된 걸로 추정하였다.

당시의 이 곳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충청도로, 전라도로 오가는 많은 이들이 북적였을 터, 그들은 쉬면서 마애불에게 무사 안녕을 빌었을 것이며 마애불은 오늘도 묵묵히 길손들을 지켜주며 이 일대가 종교적으로도 민간신앙과 함께 미륵신앙을 구현한 정토 세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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