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디지털…75년 조폐공사, ‘신뢰의 기술’ 다시 쓰다

시사1 김기봉 기자 | 한국조폐공사가 창립 75주년을 맞아 화폐 제조 중심의 공공기관에서 정보통신기술(ICT)과 문화, 수출사업을 아우르는 기관으로의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 현금 사용 감소라는 구조적 변화 속에서 기존 사업의 축소를 바라보기보다 그동안 축적한 기술과 전문성을 새로운 시장과 수요에 연결하면서 위기를 성장의 발판으로 바꿔낸 것이 핵심이다.

 

조폐공사의 변화는 주력 사업의 수요가 줄어드는 공공기관이 어떤 방식으로 생존과 성장을 동시에 모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성창훈 조폐공사 사장은 1일 창립 75주년 기념사에서 “과거 공사가 한때 ‘제2의 석탄공사’가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밝혔다. 화폐를 안정적으로 제조해온 역사만으로는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문제는 새로운 사업을 어디서 찾느냐였다. 조폐공사가 택한 방향은 전혀 다른 기술을 새로 확보하는 것보다 기존 역량을 다른 수요와 연결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분야가 ICT다. 조폐공사는 모바일 신분증과 디지털 상품권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화폐의 위변조를 막기 위해 오랜 기간 쌓아온 기술을 디지털 환경에서 신원과 진위를 확인하는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화폐 제조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과 디자인 역량은 문화상품으로도 이어졌다. 단순한 화폐 생산을 넘어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상품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면서 기존 기술의 활용 범위를 확대했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사업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조폐공사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신뢰’라는 역량은 그대로 활용됐다는 점이다. 종이로 된 화폐의 진위를 확인하는 기술이 디지털 신원의 신뢰성을 뒷받침하는 기술로 확장되고, 화폐에 적용하던 디자인 역량이 문화상품으로 이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자산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찾기보다, 보유 역량을 다시 해석해 새로운 사업으로 연결한 셈이다.

 

해당 변화는 실적에도 반영됐다. 사업 전환을 추진한 조폐공사는 지난해 역대 최대 매출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조폐공사가 제시한 다음 목표는 더 크다. 창립 80주년인 2031년을 향해 ‘세계 최초의 디지털 조폐기관’과 매출 1조원이라는 비전을 내놨다. 성창훈 사장은 “지금까지의 75년이 대한민국의 신뢰를 만들어온 역사였다면 향후 5년은 한국조폐공사가 세계의 신뢰를 만드는 기업으로 도약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75년의 역사는 단순히 화폐를 만들어온 시간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확보한 기술과 전문성, 그리고 신뢰를 새로운 시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반을 쌓아온 시간이기도 하다. 현금 사용이 줄어드는 시대에 조폐공사가 던진 답은 ‘화폐를 더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화폐를 만들며 쌓아온 기술이 오늘날 국민에게 어떤 새로운 가치가 될 수 있는지를 다시 묻는 것이었다. 조폐공사의 75년이 보여주는 변화의 핵심도 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