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허구를 만들 자유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삼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상력을 펼칠 자유가 있는 만큼,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분명히 설명할 책임도 커진다. 특히 한 시대의 역사를 뒤흔든 사건을 다루면서 실재 인물과 실제 사건을 등장시켰다면 더욱 그렇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이유다. 야권에서는 이 영화가 육 여사 서거 사건의 배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며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제작진은 특정한 역사적 결론을 새롭게 확정하거나 기존 사실을 부정·왜곡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감독 역시 영화가 중앙정보부의 권력 암투를 뜻한 것일 뿐이라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 결론을 확정한 것이 아니다”라는 해명만으로 관객이 받아들인 인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역사책과 다르다. 관객은 법정 기록이나 사료를 읽듯 장면 하나하나를 검증하면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 이야기의 흐름과 등장인물의 관계, 극적인 설정을 통해 사건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에 새로운 배후 가능성을 덧씌우는 순간, 그것이 허구라는 설명은 작품을 접한 뒤의 인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한다. 창작의 자유를 이유로 모든 비판을 차단할 수는 없다. 반대로 논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의 창작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핵심은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자유를 어디까지 책임 있게 행사하느냐에 있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면 “픽션일 뿐”이라는 말은 충분한 방패가 되기 어렵다. 픽션이라면 픽션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실화에 기반한 듯한 외형을 취하면서 결정적인 부분에서만 허구를 끌어오는 방식이라면 관객의 역사 인식에 적지 않은 혼선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에서 제작진이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그 의도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것 역시 작품의 일부가 돼야 한다. 무엇을 상상했고, 무엇을 역사적 사실에서 가져왔으며, 어디서부터 영화적 허구가 시작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극적인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비극이 단지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장치로 소비돼서는 곤란하다. 실존 인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한 사회가 공유해온 기억을 다룬다면 상상력보다 먼저 따라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책임이다. 그 책임까지 받아들일 때 비로소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