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나랏돈’이 새는 사회는, ‘신뢰’가 새는 사회다

나라와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을 쓰는 방식이 불안하다. 703억원이 투입된 국제행사에서는 홍보영상과 공연 무대의 완성도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재정난을 겪는 지방정부에서는 유족수당 예산이 통째로 삭감됐다. 여기에 4년간 6조원을 투입하는 대형 반도체 사업은 구체적인 사업계획과 예산 산출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사업의 성격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국민이 느끼는 의문은 하나다. 도대체 세금을 이렇게 써도 되는가. 공공예산은 행정기관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국민이 낸 세금을 대신 관리하는 것이기에 쓸 때마다 이유가 있어야 하고, 금액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며, 결과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진 예산은 규모가 크든 작든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여수세계섬박람회를 보자. 총사업비가 703억원에 달하는 국제행사다. 그런데 공식 홍보영상에서는 행사 주제와의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유령 분장과 B급 예능식 연출이 등장했고, 공연에서는 1톤 트럭 적재함을 배처럼 꾸민 무대가 논란이 됐다. 물론 홍보영상이나 공연의 표현 방식은 취향의 영역일 수 있다. 하지만 공공예산이 들어간 국제행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왜 이런 방식으로 기획했는지, 어떤 효과를 기대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수백억원을 들인 국제행사의 결과물이 시민들에게 납득되지 않는다면 주최 측은 취향의 문제라고 넘길 것이 아니라 기획과 집행 전반을 돌아봐야 한다.

 

전주의 유족수당 예산 삭감은 예산 편성의 또 다른 허점을 보여준다. 전북도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에게 연 120만원의 수당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대상자가 가장 많은 전주에서는 1억1214만원의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 이유는 재정 악화였다.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지속할 수 있는 재원이 없다면 사업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업을 시작할 때 취지만 강조하고 재원 대책과 지방정부의 부담 능력은 뒤로 미룬다면 결국 혼란은 고스란히 시민과 수혜자에게 돌아간다. 예산을 편성하는 단계에서부터 누가 얼마를 얼마나 오래 부담할 것인지 따졌어야 한다.

 

6조원 규모의 서남권 반도체클러스터 사업은 더 엄격하게 봐야 한다. 정부는 내년도에만 1조5000억원을 편성했다. 그런데 각 항목에 어떤 구체적인 사업이 들어가는지, 예산이 어떤 기준으로 산정됐는지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 설명자료 자체에서도 세부 항목을 ‘활용 예시’라고 설명하면서 개별 사업의 지원 여부와 규모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수조원이 들어가는 국가사업에서 ‘일단 예산을 잡고 나중에 구체화한다’는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사업 규모가 클수록 계획은 더 정교해야 하고 산출근거는 더 명확해야 한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사업이라면 국회와 국민이 예산의 필요성과 적정성을 검증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

 

결국 세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성과가 아니며, 돈을 쓰는 것 자체도 성과가 아니다. 국민이 확인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성과다. 지방재정이 어렵다면 우선순위를 다시 따져야 한다. 대형 국책사업이라면 구체적인 계획과 산출근거부터 내놓아야 한다. 국제행사라면 투입한 비용에 걸맞은 기획과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예산 편성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나와야 할 질문은 ‘얼마를 쓸 것인가’가 아니라 ‘왜 써야 하는가’여야 한다. 예산이 새는 사회는 결국 신뢰가 새는 사회다. 이제라도 정부와 지자체는 예산을 ‘확보할 대상’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