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의 부모님들은 어린 시절을 일제 강점기 속에서 보냈고, 6.25 전쟁의 두려움과 참혹함 속에서 20대를 맞이했다.
전쟁 이후의 사회 변화 속에서 1950-60년대는 ‘한복의 쇠퇴기’라고 할 수 있다. 휴전 이후 국제기구에서 보낸 구호 물품 중 그들이 입던 헌 옷, 옷감, 모포 등은 우리의 생활에 스며 들었다. 또 청계천에서 군복을 염색해 팔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사진을 볼 때마다 저 군복은 어디서 왔을까, 누구의 것이었을까 생각할 때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신생활복과 개량한복은 1950년대 말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55년 7월 8일 국회에서 「신생활복 착용안」이 통과되어 양장의 일상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여성 지도자와 공무원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1961년 9월에 재건 국민운동본부에서 발표한 「공무원 신생활복 착용」에 관한 문건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신생활복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남자는 노타이셔츠에 양복을, 여자는 여가용과 일반용을 제시했는데 그중 여가용은 완전 양장식이다. 반면 일상용으로 보이는 신생활 한복, 개량 한복은 얼핏 보아 짧은 통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통치마와 저고리를 하나로 연결한 원피스 형태이다.
외형적으로 투피스가 원피스화 되어 단순하고 편리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활동과 기능적인 면에서는 실제로 의자에 앉아 업무를 볼 때나 작업 할 때에는 위아래가 붙어 있는 옷보다 따로 떨어져 있는 옷이 효율적이다. 원피스 형태로 제시된 것은 아마도 물자 절약의 필요와 1960년대의 미니멀한 디자인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나일론 한복의 등장은 양장 보급과 양장지 수입, 의복 개량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씨아ㆍ사카ㆍ오파루ㆍ후로크ㆍ크린클 등 옷감 가공 명칭이 마치 상품명처럼 불리면서 물빨래가 가능한 나일론이 한복 옷감에 적극 사용되었다. 특히 값비싼 비로도(벨벳)는 최고의 혼수품이었을 뿐 아니라 여대생의 교복 치마라고 불릴 정도였다. 일반인도 비로도의 결이 눌리는 것이 싫어 저마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앉는 등 비도로에 얽힌 진풍경 이야기가 여럿 전해진다.
나일론 한복 열풍에 반해 전통한복은 명절, 결혼, 환갑 등 특별한 날에 입는 의례복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 잡았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가장이 있어도 전쟁으로 부상을 당해 직업도 수입도 없는 집은 대부분 엄마가 현실적 가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현금 거래를 하면서 실질적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소위 ‘삯바느질’이었다.
구제품 옷을 수선해 주거나 신생활 한복, 개량 한복 제작 등은 수요가 많았기에 삯바느질은 틈새시장으로 가계를 이끌어 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별도의 봉제 기술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구제품 옷을 본보기 삼아 오직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저마다 솜씨를 발휘했던 그들의 손길이 오늘날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