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땀 서말, 눈물 서말로 짠 모시로 여름나기

‘모시’ 하면 ‘하얀 모시옷’, ’세모시‘ 한산 세모시‘, ’모시떡‘, 우리 가곡 「그네」의 첫 소절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 가 생각난다.

 

수필가이자 시인인 피천득은 “한여름 나일론 거리에 문득 하얀 모시 적삼과 파란 모시 치마가 눈에 띤다. 뭇 닭 속에서 학을 보는 격이다”라고 표현했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생활을 “모시같이 섬세하고 깔끔하며, 옥양목같이 깨끗하고 차가웠다”고 했다. 

 

모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름철 전통 옷감이다. 부채로 무더운 여름을 이겨냈던 시절에  몸에 달라 붙지 않고, 까실 까실한 표면과 풀을 먹여 살린 탱글한 올과 올 사이로 통하는 바람은 습기가 많고 무더운 여름철 옷감으로 모시보다 좋은 것이 없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후부터 모시를 사용했고 모시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부각 된 것은 통일신라 시대 이후이다. 특히 고려시대 모시 품질의 우수성은 함경북도 육진의 ‘발이내포(鉢伊內布’) 이야기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백저포로 지은 의복은 그 깨끗함이 백옥과 같다’고 극찬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고려는 중국 황실에 황제 80필, 황후 백황홍색 저포 각 9필, 두 번째 황후에게 백저포 9필, 황저포 5필, 홍저포 4필 등 많은 양의 모시를 수시로 공물(貢物)로 보냈다,

원나라는 1322년(충숙왕 9년)부터 1354년(공민왕 3년)까지 30여년간 무늬를 넣은 저포를 공물로 보낼 것을 고려에 요구했다. 대외적으로도 품질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중국에서 거래되었던 고려산 세저포는 1필에 1냥-1냥 2전, 중저는 6전-7전이었고, 고려에 유통된 중국산 세저포는 2필에 은 1냥 2전이었다.

 

모시는 쐐기풀과에 속하는 모시풀의 껍질로 실을 만들어 짠 옷감이다. 분리한 껍질을 말린  태모시를 이빨로 가늘게 째는데 이것은 우리 모시만의 특징이다. 얼마나 가늘게 째느냐에 따라 실의 굵기와 품질이 결정된다.

그런데 현재 모시짜기에 종사하는 어르신들 대부분 틀니나 임플란트를 하여 가늘게 쨀 수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째기에 대한 해결 방안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다음 단계는 삼기 과정인데 이빨로 짼 짧은 두 가닥을 허벅다리 맨살 위에 놓고 각각의 머리와 꼬리를 맞대어 비벼 길게 이어주는 과정을 반복하여 모시굿을 만든다.

 

다음 10개의 굿을 조슬대 구멍에 각각 끼워 10올의 실가닥으로 새쫓기를 하면서 날기를 한다. 날기는 베틀 위에 올릴 날실인 경사를 준비하는 작업이다.

 

다음은 매기 과정으로 바디에 경사 가닥만큼의 실을 꿰고 콩풀을 매기는 작업이다. 경사는 1승을 80올로 계산하기 때문에 10승포(10새)는 800올, 12새는 960올(80×12)의 실가닥을 바디 각 구멍에 끼우고 콩풀을 먹여가면서 도투마리에 감는다.

 

매기가 끝나면 도투마리를 베틀에 얹고 짜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섬유에서 실을 자아 옷감을 짜는 모든 과정을 길쌈이라고 하며 태모시, 삼기, 짜기는 혼자서 하는 작업이지만 날기와 매기는 공동으로 작업하여 예로부터 두레, 품앗시 형태로 이루어졌다.

 

충남 한산이 가장 좋은 모시 생산지로 알려진 것은 1930년대이다. 그러나 소비가 줄고 생산량이 적어지면서 1967년에 정부가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현재 한산모시짜기는 중요무형문화재 14호, 한산세모시짜기는 충남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여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새벽 4시에 한산모시장이 열렸다.

거간들이 불빛 아래에서 모시의 등급을 매기는 모습과 자식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자기에 싼 모시를 손에 쥐고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 기웃거리는 어머니, 할머니의 가슴 찡한 모습은 이제는 보기 어렵다.

 

한산모시짜기는 2011년에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어 해마다 6월에 모시문화제축제가 열린다. 앞으로도 전통 모시짜기의 명맥이 잘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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