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거대 인공지능(AI)이 인류의 문명지도를 재편하는 지금, 국제사회는 기술의 이면에 숨은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 소리 없는 ‘규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인류 번영이라는 대의(大義)를 공유하면서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와 UN(국제연합)이라는 두 거인은 전혀 다른 속내로 충돌하는 양상이다.
‘선진국 클럽’인 OECD는 기술의 신뢰성과 규제의 호환성에 방점을 찍는다. 국가별 규제 파편화에 따른 기업의 비용을 최소화하고, 실용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를 구축하는 것이 이들의 핵심 프로토콜이다. 반면 193개 회원국을 아우르는 보편적 기구인 UN의 시선은 ‘포용적 공생’으로 향한다. 기술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디지털 신식민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가짜 뉴스와 딥페이크가 개도국의 민주주의와 문화적 다양성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 기술 혜택을 소외 없이 나누기 위한 ‘정치적·윤리적 정당성’ 확보가 UN의 최우선 가치다.
이들의 대립 이면에는 세 가지 전선(戰線)이 가로놓여 있다.
첫째는 미국·EU 중심의 기술 독점에 맞서 전 세계의 평등한 발언권을 요구하는 ‘규제 주도권’ 싸움이다.
둘째는 경제적 가치 선점을 노리는 ‘혁신론’과 인권 보호를 앞세운 ‘통제론’의 격돌이다.
셋째는 컴퓨팅 자원과 데이터가 북미·유럽에 편중되면서 미래 지식 자산마저 종속될지 모른다는 ‘글로벌 사우스(개도국)’의 위기감이다.
이 치열한 패권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은 독보적인 카드를 쥐고 있다. 우리는 미국과 견줄 만한 독자적 초격차 AI 기술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이자, EU 수준의 촘촘한 디지털 행정·규제 프레임워크를 갖춘 나라다. 무엇보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무이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이러한 다층적 정체성은 한국이 다자간 협상 테이블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실용적 중재자’이자, 안전과 혁신의 균형을 잡는 ‘대안적 규범 제시자’로 나설 수 있는 힘이 된다.
실제 한국의 외교와 입법 정책은 세 가지 쟁점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응축하고 있다. 주도권 싸움에는 UN 산하 국제기구들과 함께 서울에 ‘글로벌 AI 허브’를 조성하는 ‘가교(架橋) 리더십’으로 답했다. 규제와 진흥의 갈등 앞에서는 최근 시행된 『인공지능기본법』을 무기로 삼았다. 혁신을 위한 진흥은 확실히 보장하되 사회적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는 ‘한국형 유연한 법제화 모델’의 제시가 그것이다. 기술 종속 우려에 대해서는 우리의 안보와 문화적 맥락을 완벽히 반영한 독자적 생태계, 즉 ‘소버린 AI(Sovereign AI)’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글로벌 빅테크의 독점에 신음하는 국가들과 주권적 기술 협력을 추진하며 공익적 데이터 공유 모델을 옹호하는 전략이다.
“미국처럼 혁신하고, EU처럼 규제하며, UN의 정신으로 개도국과 기술 혜택을 나눈다.”
이 영리한 노선은 대한민국이 AI 3대 강국(G3)으로 도약하려는 국가적 야망과, 글로벌 공공재 공급자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결합한 외교적 총체다. 패권 다툼으로 얼룩진 글로벌 AI 전쟁터에서, 한국이 제시하는 중도와 균형의 이정표가 세계 표준의 새로운 나침반이 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