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군의 정예화과업을 성공적으로 끝낸 조광윤은 군 내부에서 높은 명망을 쌓게 되었고, 군사적 재능도 과시하게 되었다. 강대한 정예군을 갖게 된 세종은 중원(中原)을 지배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중국통일의 야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955년(세종2), 형부낭중(刑部郎中) 왕박(王僕)이 남쪽의 남당을 먼저 친 다음에 북쪽의 연운16주와 북한을 치자는 ‘선남후북(先南後北)’ 책략을 내놓았다. 세종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세종은 선남후북 책략에 따라 우선 남당부터 정복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남당정벌에 앞서 조광윤에 의해 정비된 군대의 자질을 시험해 보기 위해 그는 후촉(後蜀: 934~965)의 진(秦), 봉(鳳), 성(成), 계(階) 등 4개 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 4개 주는 원래 중원왕조의 땅이었으나 후진(後晋) 때 후촉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에 다시 수복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955년 5월, 세종은 선휘남원사(宣徽南元使) 겸 진안(鎭安)절도사 향훈(向訓)과 봉상(鳳翔)절도사 왕경(王景)에게 명해 함께 후촉 4개 주를 공략하도록 명했다. 왕경은 대산관(大散關)을 출발해 진주(秦州)로 진격했으나, 황우채(黃牛寨)를 공략한 후부터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후촉의 대장군 이정규(李廷珪)는 철저하게 수비하는 한편, 후주군의 군량수송로를 차단시켰다. 당시 후주의 무장들과 조정대신들은 모두 이번 전쟁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다. 세종은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세종의 머리에는 고평전투와 군대정비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조광윤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세종은 후촉 4개 주에 대한 군사행동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조광윤에게 즉각 서부전선(西部戰線)으로 가서 전쟁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명했다. 세종의 명을 받은 그는 곧장 후촉을 향해 서쪽으로 떠났다. 그에게 있어서 이번 과제는 하나의 큰 모험이었다.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 장군이지만 아직 조정의 중신은 아니었다. 돌아와서 조정에 보고한 상황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가 내놓은 건의가 옳든 그르든 결국은 불만스러워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만일 전쟁을 그만두자는 여론에 맞장구친다면 조정중신들의 호감을 얻게 되지만 황제의 불만을 사게 될 것이다. 반대로 한사코 전쟁을 주장한다면 황제의 뜻에는 영합하지만, 실패하게 되면 책임을 지게 되고 황제를 기만한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시찰은 번거롭기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하기조차 한 일이었다.
진정한 군사전략가는 오로지 군사상의 성패에 대해서만 분석하며, 시류영합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진실한 정보에 의해 공략의 이해를 따지고, 공략의 승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다. 서부전선에 도착한 조광윤은 먼저 왕경이 황우채를 탈취한 이후 정체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것은 군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군량이 도착하면 다시 진공을 개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 다음 그가 알게 된 것은 한 번 승리를 거둔 왕경부대(王景部隊) 장병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병마다 건장하고 군공을 세우려는 의욕으로 불타 있었다. 이러한 군대야말로 믿을 만하고 승전할 수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리고 조광윤은 왕경과 전황에 대해 분석하고, 4개 주 탈취의 중요성을 논했다. 이 곳 4개 주는 후주에서 후촉 땅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조조(曹操)를 치러나갈 때마다 이 지역을 탈취했던 것이다. 이곳을 탈취하는 것은 후촉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이고, 장차 후촉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