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의 물결은 이제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우리가 구축해 온 사회적 신뢰 체계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딥페이크를 이용한 정교한 사기 행각이 현실에서 피해를 양산하고 있으며, 인간의 직관만으로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했다. 인간이 시각 정보에 의존해 온 오랜 역사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더이상 공허한 격언이다. 이제는 그야말로 백견불여일확(百見不如一確)이다.
이러한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신뢰의 공백 속에서, AI는 물리적 실체를 갖춘 피지컬 AI의 형태로 현실에 더욱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산업 현장의 위험한 업무를 대체하고, 자율주행과 가정용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로봇의 등장은 AI가 단순한 소프트웨어를 넘어 현실 세계의 주체로 자리매김했음을 선언한다.
글로벌 경쟁 구도는 이미 치열하다. 중국은 방대한 시장 규모와 실전 데이터를 기반으로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을 선도하며 국내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이는 국가 산업 주권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며, 기술 종속을 막기 위한 시급하고 전략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에게는 명확한 기회가 존재한다. 우리는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 첨단 산업에서 수십 년간 축적해 온 고품질 데이터라는 'AI 시대의 원유'를 보유하고 있다. 이 독보적인 자산을 피지컬 AI 학습에 접목하는 것은 기술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강력한 발판이 될 수 있다.
AI 시대의 도래는 기술 개발이나 제도 개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총체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이 거대한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공직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개인의 수용 자세다. 공직자는 더 이상 AI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육과 실무를 통해 다음 두 가지 핵심 역량을 심어주어야 한다.
첫째, 새로운 판별력의 확립이다. '일단 믿지 말고 확인하는' 비판적 사고방식을 내재화해야 한다. AI가 생성한 정보와 결과물에 대해 맹목적인 수용을 지양하고, 그 출처와 논리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AI 도구가 제시하는 데이터 분석이나 예측 모델을 활용할 때, 공직자는 그 알고리즘이 어떤 데이터를 학습했는지, 어떤 편향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AI가 도출한 결론이 아무리 정교해 보여도, 그것이 사회적 맥락과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둘째, 전략적 기회 전환이다. AI를 단순한 위협 요소로만 인식하는 것을 넘어, 이 기술 변화를 공공 서비스 혁신과 국가 경쟁력 강화의 새로운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를 주입해야 한다.
민원 처리 시스템의 지능화, 재난 예측 모델의 정교화, 복지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데이터 분석 등 AI는 공공 영역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한국이 보유한 산업 데이터를 공공 영역과 전략적으로 연계한다면, 우리는 글로벌 AI 경쟁에서 독자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투명성과 책임성의 강화다. AI 시스템이 내린 결정이나 판단을 시민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알고리즘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식의 블랙박스식 대응은 신뢰를 무너뜨릴 뿐이다. 공직자는 AI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그 결과를 시민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을 갖춰야 한다.
특히 AI가 개인의 권리나 공공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릴 때, 그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며, 잘못된 판단에 대한 책임 소재도 명확해야 한다. 신뢰는 투명성에서 시작되고, 책임성으로 완성된다.
AI 시대의 신뢰 위기는 공직자들에게 과거의 관성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읽어내는 통찰력을 요구한다. 이 새로운 이야기의 첫 장을 우리가 어떻게 써 내려갈지가 미래 사회의 안정성과 발전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공직자는 AI 기술의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비판적 판별력으로 AI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전략적 사고로 그 가능성을 공공의 선으로 전환해야 한다. 투명한 소통으로 시민과의 신뢰를 재구축하면서도,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 혁신의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AI 시대의 신뢰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무장한 공직자가 서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 공직자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