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충수의 세상을 밝히는 힘 (14)] 보여주기식 행사에 가려진 공무원의 ‘주말’

  • 등록 2025.09.25 00: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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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전국 곳곳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지역 축제와 행사는 지역 정체성을 살리고, 주민 참여를 유도하며, 때로는 관광 수입까지 노리는 중요한 기회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의 장’이 유지되기 위해 희생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공무원들이다. 겉으로 보기엔 자발적 협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만큼 무리한 요구가 따른다.

 

최근 논란이 된 울산 남구의 ‘고래축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무려 217명의 내빈을 일대일로 의전하기 위해 300여 명의 공무원이 배치됐고, 이들은 평일 저녁과 주말까지 시간을 반납해야 했다. 그 대상은 시장, 국회의원뿐 아니라 향우회 회장, 상인회 회장, 어린이집연합회 단장 등 민간 단체 인사들까지 포함돼 있었다. 사실상 ‘인형처럼 붙여 세운’ 전시 행정이 아니고서야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의전이 개인의 시간을 침해한다는 데 있다. 공무원도 직장인이며,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녀다. 공적 명분 아래 사생활이 침해되고, 가족과 보내야 할 저녁과 주말이 일방적으로 소진되는 구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공무원 사회의 피로와 자괴감을 키워왔다. 실제로 일선에서는 “공무원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 동작구가 제정한 ‘주말 행사 동원 금지 조례’는 매우 의미 있는 전환점이다. 전국 최초로 공무원의 사생활과 휴식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이 조례는, 단순한 복지 차원이 아니라 행정의 체질 개선을 예고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문득 작년 이맘때,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서 열린 주민참여예산 토론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시민이 직접 정책을 제안하고, 투표와 토론을 거쳐 예산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그 취지는 분명 가치 있었다. 하지만 현장은 달랐다. 참여 시민 수가 저조하자 공무원들이 대거 배치됐고, 심지어 가족까지 동원된 모습도 보였다. 내가 참여한 원탁 테이블에서는 8명 중 단 3명만이 시민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공무원이었다. 그 순간, ‘이 행사가 정말 시민 중심인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자치의 핵심은 ‘주민 참여’에 있다. 그러나 그 참여가 수치 채우기에 급급한 ‘동원’으로 전락한다면, 이는 시민과 공무원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공무원이 행사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사가 정당성을 갖는다는 착각도 경계해야 한다. 공무원도 시민이며, 이들의 참여는 자율적이어야 한다. 주말과 저녁은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삶의 시간’이지, 예외적으로 제공되는 ‘유휴 자원’이 아니다.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앞으로 더 많은 지자체들이 동작구처럼 공무원의 휴식권을 보호하는 제도를 마련하길 기대한다. 동시에 축제나 행사를 기획할 때, ‘얼마나 화려해 보일까’가 아닌 ‘얼마나 의미 있게 남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보여주기식 전시 행정이 아니라, 시민과 공무원 모두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역 행정이 진화해야 한다.

 

진짜 사람을 위한 행정은 ‘숫자 채우기’가 아니라, ‘존중’에서 출발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충수 기자 cody3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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