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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이름 '치리승만(治李承晩)' 지은 월파 서민호 선생 누굴까

3.1운동 100주년 전남 고흥 출신 애국지사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 때 반도 목탁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동향인 애국지사 월파 서민호 선생의 항일·반독재·통일운동을 짚어 본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시정부 비밀지령문 반도 목탁지 사건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이며, 이승만·박정희 정권과 반독재투쟁을 전개했던 전남 고흥ㅍ출신 월파(月波) 서민호(徐珉濠, 1903~1974)선생의 일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남녀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그린 언론보도와 드라마, 영화 등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19년 일본 동경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은 세계 역사에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전국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월파가 출생한 전남 고흥은 58년 전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나의 출생지를 정확히 말하면 전남 고흥 두원면 용당리 282번지 구룡부락이다.

 

지난 2010년부터 최근까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시와 글로 남긴 이윤옥 시인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1-10권)을 통해 서평을 써왔고,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해 왔다. 이번 글은 제가 태어난 전남 고흥과 동향인 월파 서민호 선생에 대해서 조명해 볼까한다.

 

지난 2019년 1월 24일 국회기자클럽 주최 윌파 서민호 학술대회 토론회 자료와 '월파 서민호 회고록', 언론 보도, 블로거 글 등을 통해 알려진 그의 삶을 추적해 글을 전개해 보고자 한다.

 

지난 2월 25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동향인 전남 고흥 대서면 출신 송영길(4선, 인천게양) 의원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동안 인천 출신 죽산 조봉암 선생을 조명해온 그가 고향 출신 독립운동가이며 반독재 투쟁을 해온 월파 서민호 선생을 조명해 보자고 제안했다. 대화를 끝낸 후, 의원실을 나오면서 월파 서민호 선생에 대한 어릴 적 기억들이 주마간산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 후보 포스터며 달력 사진이며, 동네 어르신네들이 들려줬던 정적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한 서민호 선생의 얘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순천평화관 사건으로 옥중에 있던 월파는 장남 원룡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맏아들(서원룡)에게 부탁해 3명의 손녀 손자 이름을 ‘치리(治李)’ ‘치승(治承)’ ‘치만(治晩)’으로 짓게 했다. 독재와 폭정을 일삼은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이가 갈렸으면, 자신이 죽어도 손자들에게까지 치리승만(治李承晩)이라고 했을까. ‘그를 다스려, 혼내주라’고.

 

월파 서민호 선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일제 강점기 때 반도목탁지사건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고,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반독재 투쟁을 했던 민주열사이면서 남북통일을 지향했던 통일운동가라고 말하고 싶다.

 

월파가 타계하기 2년 전에 기록한 <시대와 맞섰던 한 평생, 월파 서민호 회고록>에는 반도 목탁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 놨다.

 

‘반도 목탁지’란 상해임시정부의 비밀지령문을 일컫는다. 1919년(기미년) 3.1운동의 여파 속에 일어난 사건인데,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월파가 이 지령문을 등사해 각 지역으로 돌렸던 주모자였다. 3.1만세운동의 여파로 일제 탄압이 극심할 때였다. 당시 보성고보의 교장은 3.1운동 기미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후 반미특위 재판에서 친일 전력이 밝혀지자 참회를 해 법정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든 최린 선생이다. 바로 "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월파는 재학 중 이 지령문을 돌린 주모자로 정학 1년에 처해진다. 이 사건이 바로 ‘반도 목탁지’사건이다. 반도 목탁지 사건에 연루된 그는 극심한 일제 탄압이 이어지자 상해임시정부로 피신하려고 서울 청진동 하숙집에 은거해 있다,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감옥에 간 당시 나이가 10대였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월파는 1921년 중학교 3학년 때(18살) 같은 나이 이화여자고보생인 정희린(1903~1967)과 결혼을 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두 번째 옥고를 치른다. 1921년 결성한 조선어연구회가 10년 후인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명한다. 1942년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그해 10월 300여명을 검거를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서민호는 조선어학회 자금조달책이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모진 악행과 고문을 당했다. 300명 중 주동자 33인으로 지목됐고, 그중 27명은 함흥형무소로 이송돼 옥고를 치렀다. 함께 함흥에서 옥살이를 했던 이윤재와 한징, 두 사람은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고, 그는 해방 1년여를 남기고 1944년 2월에 출옥했다.

서민호 관련 조선어학회 사건을 생각하면서 최근 인기리에 상영한 영화 <말모이>가 생각난다. 특히 조선어학회 직원 중 과거 신세를 졌다는 이유로 무식쟁이 판수(유해진 분)를 직원으로 적극 추천한 조 선생(김홍파 분)이 서민호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사한 야쓰다는 창씨를 개명한 조선인 안정묵이었다. 안정묵은 조선어학회 연구위원인 교사 정태진을 조사하며, 모진 고문를 통해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을 불게 한 인물이었다.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시절 당시 순천평화관 사건으로 서민호를 조사한 사람도 바로 안정묵이었다.

 

순천평화관 사건은 서민호 당시 국회 내무분과위원장이 1952년 4월 24일과 5월 10일, 각각 있을 시읍면 선거와 도의원 선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선거일을 앞두고 전남지역을 시찰하면서 발생했다.

 

그의 회고록에는 순천평화관 사건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여수에서 청중들에게 지방선거의 중요성을 역설한 후, 순천시 영동에 있는 평화관이란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내무분과위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정세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를 옆방에서 엿들은 사람을 보고 호위경관이 소리쳤다. 엿 든 사람은 군인 서창선이었다. 그는 이곳 호위경관 등과 실랑이를 했고, 서민호라는 것을 확인하고, 4~5미터 거리에서 권총을 빼들고 쏘았다, 총알은 서민호를 적중하지 못했고 식당 유리창이 깨졌다. 서민호는 위기일발의 순간 본능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권총을 꺼내 그를 쏘아 사살했다. 정당방위였지만 그는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자책을 했다.

 

이로 인해 57년 7월 1일 이승만 정권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60년 4.19혁명이후 그해 27일 국회석방 결의로 8년간 수형생활을 마치고 4월 29일 출옥했다. 특히 순천평화관 사건으로 조사를 했던 악질형사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사했던 안정묵이었다. 서민호는 후일 회고록에서 악질 안정묵에 대해 고춧물먹이기, 비행기태우기, 동지들을 맞세워 서로 뺨 때리기, 얼굴 먹칠해 토끼 뜀 시키기, 발가벗겨 일렬로 세워 때리기 등의 악행과 고문을 일삼았다고 밝혔다.

 

그는 1961년 5.16이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교류론, 남북서신교류 등 통일운동을 하다 구속됐고, 한일협정 비준 파동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직전 '죽어서도 통일을 보고 싶다, 통일로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해 거기다 무덤을 썼다. 1974년 통일로 주변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됐다가 지난 2004년 10월 13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지에 이장했다.

 

고흥군 동강면 죽산리 출신인 월파 서민호 선생은 4선의원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과,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 정치역사학과와 미국 컬러비아 대학 정치사회학부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 때인 3.1운동 반도 목탁지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송명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행방직후 벌교읍건준위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전라남도지사. 조선전업주식회사 사장, 제2대 국회의원(내무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내무분과위원장 시절 순천평화관 사건으로 8년 2개월을 복역했고 4.19혁명으로 출옥했다. 제15차 유엔총회 한국대표, 5대 민의원(부의장), 6대와 7대 국회의원, 민중당 최고위원, 한일협정 비준반대를 주장하며 국회의원직을 사직했고, 대중당 대표최고위원, 대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기호4번 대중당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야당의 단일화를 주장하며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 당시 서민호 대중당 대통령 후보 벽보 슬로건으로 ‘보수로 로망친 정치, 혁신으로 살려보자’, ‘태양같이 밝히자 어두운 이 강산을’이라고 적었다. ‘보수로 로망친 정치’는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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