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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과의 만남 30-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고려초 최고(最高)의 바위괘불

 

(시사1 = 김재필 기자) 나는 여름이면 시흥시에 있는 관곡지 연꽃 촬영을 자주 간다. 관곡지는 조선 세조 때 강희맹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연꽃 씨앗을 심어 연못을 조성한 곳이다.

오늘은 연꽃이 피기전 날아오는 저어새를 촬영후 시흥에 있는 또 하나의 명물인 소래산에 있는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이하 마애불로 칭함)’을 답사하기 위해 소래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관곡지에서 10여km 떨어진 곳으로 자동차로 10여분을 달리니 소래산 휴양림 입구에 다다른다.

 

소래산(蘇來山)은 인천, 부천, 시흥3개 도시의 경계속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 299.6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돌이 많고 가파르기는 하나 마애불을 만나러 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어렵지는 않다.

주차장에 주차 후 휴양림 입구에서 출발하여 쉬엄쉬엄 20여분을 오르니 나무테크가 둘러쳐진 평지 위에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가 보인다.

테크 밑에서 올려다 보니 바위 앞에서 기도하는 두 분 할머니외엔 마애불이 안 보인다.

불심이 약했을까?

계단을 올라가 정면에서 바위중심을 찬찬히 뜯어보니 아뿔싸 장대한 마애보살상이 연화 대좌를 딛고 서서 대야동 아파트촌을 바라보고 있다.

 

마애보살입상은 소래산 8부 능선 동북쪽에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일명 ‘병풍바위(주민들에겐 장군바위로도 불린다)’라는 바위면에 곱돌로 그린 듯 깊이 5mm정도의 얕은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마애불 앞엔 3-40여명이 예불을 드리거나 앞을 조망할 수 있도록 평탄지를 조성하여 테크를 설치 하였다.

 

보편적으로 마애불이라고 하면 바위면에 새긴 부조상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이 보살상은 보관에서부터 연화대좌에 이르기까지 전신이 돌출된 부분 없이 선각으로만 새겨져 괘불을 장군바위에 걸어 놓은 듯 하다. 이 마애불도 몇 년전에 촬영했던 경주 남산 삼릉계곡에 있는 ‘삼릉계곡 선각육존불(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과 같이 ‘쑥돌’이라 불리는 단단한 화강암벽을 캔버스 삼아 선의 세세한 흐름을 세필로 그린 정교한 선묘화라고나 할까?

 

이 마애불은 단단한 화강암을 캔버스로 택한 석공의 안목, 날카로운 선각기술과 예술성, 바위신앙을 불교신앙으로 바꾼 종교성등이 일부 풍화로 인해 마모가 되긴 했지만 천여년의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아닐까?

 

 

머리에 쓴 원통형 보관엔 연화문 대신 당초문(唐草文. 고구려 안악 고분군에서도 볼 수 있는 무늬다)을 새겨 넣어 화려하게 보인다.

불상의 보관에 당초문이 새겨진 예는 이 마애불이 유일할 것으로 추측 된다.

자세히 보니 독특하게도 보관 양 옆으로 솟아올라 소뿔과 같은 모양의 뾰족한 관대에도 당초문을 새겨 한껏 멋을 더 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러한 관대는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금동판에 선각으로 새긴 비로자나불좌상(863)에서도 볼 수 있다.

 

얼굴은 갸름하고 눈, 코, 입이 큼직하며, 양쪽 귀는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또한 목에는 번뇌도(煩惱道)·업도(業道)·고도(苦道)의 삼도(三道)의 선이 새겨져 있고 어깨는 넓고 장대하여 자못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싼 옷인 법의는 배에서부터 규칙적인 반원을 그리며 무릎까지 물결치듯이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또한 가슴에는 속옷을 묶은 띠 매듭이 선명하다.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쓴 모습이나 이목구비가 큼직하게 표현된 것은 고려 전기 석불 조각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오른손은 가슴으로 올려 바깥쪽으로 향하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고 있다. 당초무늬가 시문 된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발꿈치를 붙이고 양쪽으로 발끝을 벌린 자세를 하고 있는데, 발가락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두광이나 신광은 생략 되어 있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전체 높이 약 12.2m(머리 높이 3.4m, 보관 높이 1.4m), 어깨너비 약 3.7m, 연꽃 모양 대좌 너비 약 4.7m에 달하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마애불상 조각 중에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17.4m)’ 다음으로 매우 큰 편이다.

 

소래산 주위엔 불교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 거대한 마애불은 왜 이 곳에 조성 되었을까?

마애불이 내려다보는 대야동은 예전에는 남서쪽 물길을 따라 바닷길이 바로 열리는 곳이었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쓴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소래산에 대해 ‘府 24리 거리에 있는 鎭山이며, 동방천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당시 소래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을 것을 감안 한다면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왕래에 있어서 중요한 포구로 개경과 중부권을 잇는 수운(水運)의 요충지로써 왕실이나 이 곳 호족세력들이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고 나말여초를 거치면서 오랜 전쟁에 시달려 왔던 민중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나눠 주려 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중앙일보 1973년 6월15일자의 기사엔 마애불 발견 당시의 내용이 담겨 있다.

<단국대 박물관은 지난 10일 인천 동쪽 8㎞ 떨어진 부천군 소래면 대리 뒷산에서 12.5m의 거대한 마애불을 조사하고 10세기께의 작품이라 추정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이제까지 학계에 알려진바 없는 이 마애불은 지방민들이 「장군님」이라고 불러오는 음각선묘의 것.

마애불 밑으로 촛물이 녹아 흘러 수북이 덩이진 것으로 보아 근자에도 예배의 대상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불상의 얼굴부분은 깎아지른 절벽의 까마득한 꼭대기에 그려져 있어서 표정을 분명하게 살필 수 없지만 옷자락 아랫단의 Ω형 주름무늬와 불상이 딛고선 앙련좌의 섬세한 연판 무늬로 보아 신라말기의 조각으로 짐작된다고 정영호 교수는 말했다.>

 

이렇듯 가치 있는 마애불이 새겨진 병풍바위는 그 후에도 관리 부재로 「록·크라이밍」등의 암벽으로 이용됐다니 당시 문화재에 대한 부족했던 안목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한편 6.25때의 일화도 전해 온다.

연합군이 미사일 탱크의 영점조준을 하기 위해 이곳 병풍바위에 6발을 쏴 그 중에서 4발이 맞았는데 총알이 비껴 가 마애불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 사람들이 ‘이곳 마애부처님은 정말 영험함이 있다’ 는 소문이 나서불공을 드리거나 참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답사 1시간 동안에 다른 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마애불은 1990년 향토유적으로 지정되기 전엔 주민들은 장군바위 또는 병풍바위로 불렸으며 처음에는 문화재적 가치가 저 평가 돼 있다가, 2000년대 초 당시 문명대 동국대 교수가 조사를 통해 보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재평가가 이루어져 보물 1324호(지정일 : 2001.09.21.)로 지정 되고, 명칭도 ‘시흥 소래산 마애불'에서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으로 변경됐다.

 

마애불 답사를 마치고 우측을 보니 돌탑 두 개가 높이 쌓여 있다.

이 탑은 최근에 쌓은 것 같지 않고 상당히 오랜 시간속에 쌓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주위엔 들어 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걸 보니 무슨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고 한참을 올려다 보고 있는데 할머니 두 분이 기도를 마치고 의자에 앉으며 무릎을 두드린다.

“그렇게 힘드신데 어떻게 올라오셨어요?“ 라고 물으니 ”그래도 부처님 뵈야 한 달 동안 모든 게 편해“ 할머니 혹시 저 돌탑이 언제 쌓여진지 아세요”?“

”알지 알고 말고“ 그 분한테서 들은 돌탑에 대한 사연은 이러하다

‘은행동에 있는 현재 비둘기 공원이 있는 자리는 생매산이라는 산이 있었다.

이 마을에선 생매산을 ’할매산‘, 소래산을 ’할아버지산’이라 불렀다.

 

소래산과 마주하는 생매산은 해발 86m로 은행동등 4개 동에 걸친 넓게 펼쳐진 구릉으로 소래산과 마주 보던 산이었다.

생매산은 돌이 많아 새매의 서식처가 되어 ‘새매산’이라고도 하였는데 점차 음이 변하여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샘미산, 모래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헌데 도시개발에 따라 1992년에 '은행지구 택지개발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생매산을 없앴다. 할매산이 없어진 것을 주민들은 못내 아쉬워하다가 한 주민의 제안으로 없어진 할매산을 위로하기 위해 할아버지 산에 있는 부처님(마애불) 옆에 두 분을 상징하는 돌탑을 쌓기로 했다.

돌탑은 주민들이 시간되는 대로 자발적으로 쌓았으며 가끔 마애불을 찾아 오는 사람들도 같이 참여 했다‘고 한다.

 

바위 위를 쳐다보니 푸른 하늘에 묘한 형상을 한 흰 구름이 떠 있다. 저 구름은 천년동안 마애불 위에서 소래산과 마애불을 지켜봤을터 역사는 사람들이 만든다.

작은 돌탑이지만 마애불과 함께 소래산의 역사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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