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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보는 반 고흐의 예술세계와 인간성

[서평] 신성림 작가의 번역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 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을 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영혼의 화가, 태양의 화가라고 불리는 빈센트 윌렘 반 고흐가 죽기 1년 전 쯤인 1889년 7월이나 8월경 동생 테오에게 쓴  '지독한 갈망'이란 편지이다.

 

고흐가 1872년 8월부터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첫 편지의 왕래가 시작됐고,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668통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세 차례 편지 왕래가 끊기기도 했다.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로 불꽃같은 정열과 격렬한 필치로 눈부신 색채를 표현한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나눈 편지를 묶어 <반 고흐, 영혼의 편지>(위즈덤하우스, 2022년1월17일, 3판 22쇄)란 제목으로 신성림 작가가  옮겼다. 즉 고흐가 쓰고 신 작가가 한글로 번역한 셈이다.

 

신 작가는 고흐의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인생과 생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고, 특히 그의 그림과 소설과 평전을 들어다보고 기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후 다시 그림을 살피니 강렬한 색채와 특유의 꿈틀대는 기운을 알게 됐고, 바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고흐의 삶과 그림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보수적인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날 그림을 파는 화랑에서 일했고, 전도사로도 활동했다. 이후 1879년 여름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다.

 

그는 초벌 그림이 스케치되고 스케치가 유화가 되듯, 최초의 모호한 생각을 다듬어감에 따라 그리고 더없이 지나가는 최초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감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명확해질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고흐가 본의 아니게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새장에 갇힌 새'와 비유한다. 끔직한 새장에 갇혀 아무것도 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 손상된 명성, 가난, 불우한 환경, 역경 등이 사람을 죄수로 만든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감옥을 없애는 방법이 깊고 참된 사랑이라는 점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가치이며, 그 마술적 힘이 감옥의 문을 열어준다고. 그것이 없다면 죽은 것과 진배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곳에 인생은 다시 태어난다고도 설파한다. 그에게 감옥은 편견, 오해, 치명적인 무지, 의심, 거짓 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고흐는 예술을 끈질긴 작업이라도 했다.

 

"예술은 끈질긴 작업,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작업, 지속적인 관찰을 필요로 한다. '끈질기다'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쉼없는 노동을 뜻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 본문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림'  중에서

 

화가의 의무에 대해 그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이해 할수 있는 그림이 된다. 만일 팔기위해 그린다면 그런 목적에 도달할수 없다. 그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결코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작업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영감을 얻게된다." - 본문 '화가의 의무' 중에서

 

그는 옛것을 모방한 유행을 따라가선 안된다고 말한다. 그가 좋아한 화가 밀레의 말을 인용해 '스스로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라는 경구를 선보인다. 이 말에 대해 그는 '깊이를 헤아릴수 없는 대양처럼 심호하다'면서 가슴 깊이 새겼다고.

 

1888년 10월 23일부터 당대 화가 고갱과 함께 작업에 몰두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불화가 심해졌다. 그해 12월 23일 고갱과 심하게 다투 후 자신의 귀를 잘랐고, 직후 고갱은 파리로 떠났다.

 

이후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힘든 노동과 같다'고 말한다.

 

"그림 그리는 일은 힘든 노동과 딱딱한 계산을 병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작업 중에는 어려운 배역을 맡고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극도로 긴장하게되고, 단 30분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런 작업을 마치고 나서 긴장을 풀고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술 한잔 마시거나 독한 담배를 피우면서 멍하니 취해 있는 것이다." - 본문 '그림을 그리는 일은 힘든 노동' 중에서

 

그는 색채 탐구에도 열정을 쏟았다.

 

"색채를 통해 무언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 본문 '색채를 통해 뭔가 보여줄 수 있길' 중에서 

 

이후 고흐는 끝모를 죄책감과 무력감에 발작을 일으키면서 요양원에 입원한다. 이 시기인 1890년 1월 18일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한 갤러리 '20인 그룹전'에서 유화 여섯점이 전시됐고, 당시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가 '고독 화가, 빈센트 반 고흐'란 주제로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에 평론을 실었다. 전시 작품 중 유일하게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다. 이것은 생전 고흐가 그린 유화작품이 첫 판매가 된 것이었다.

 

이후 장남인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표현하고 싶은 야망을 드러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어쩌면 내 그림의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모든 것을 받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그리고 고흐의 동생 테오가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인간성을 유추할 수 있다.

 

“형의 지식과 세상에 대한 명석한 시각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다. 게다가 형은 항상 남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란다.”

 

두 편지 내용을 보면 고흐의 고뇌에 찬 예술관을 알 수 있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간에 대해 배려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화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간질성 발작이 점점 심해지면서 고흐는 오베르쉬르 우아즈로 옮겼고, 닥터 가세의 치료를 받았지만, 1890년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쏘아 피를 흘리며 의식은 점점 희미해갔다.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동생 테오의 품안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란 가득한 삶을 마감한다.

 

사망하기 닷새 전, 그는 마지막으로 동생 태오에게 '궁지에 몰리는 화가들(1890년 7월24일)'이란 편지를 보냈고. 생전 테오가 '이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흐는 사망할 당시 품안에 테오에게 보낼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편지가 발견됐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1890년 7월 24일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내용이 너무 우울해 부치지 않았었다고.

 

테오는 고흐가 죽고 6개월이 지난 1891년 1월 25일, 형이 죽은 이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돼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1914년 고흐의 서간집이 출간됐고, 그해 테오의 유해는 고흐의 무덤 옆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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