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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매불과의 만남 29-합천 치인리 마애여래입상

반야용선의 도사공(都沙工)

 

(시사1 = 김재필 기자) 불교의 어떤 의식에서나 필수적으로 가장 먼저 행하여지는 의식에 삼귀의(三歸依)가 있다.

속세의 탁한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佛, 法, 僧에 귀의해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하는데 우리나라 삼보의 사찰로는 양산 통도사(불보종찰), 합천 해인사(법보종찰), 순천 송광사(승보종찰)가 있으며 해인사(海印寺)가 법보종찰로 불리는 이유는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는 경남 합천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07년)으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해인(海印)이란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과 사물이 바다 가운데에 도장처럼 깊게 비추어진다는 뜻으로 해인사는 남북국(남국 : 신라, 북국 : 발해) 시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35년 11월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金德摯) 왕자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이곳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신라 말 '승통희랑'(僧統希朗, 889~967)이라는 당시 주지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쳐 고려 왕조를 세우는데 일조를 하여 고려 건국 후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1481년 조선 성종 12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으로서 국보로 지정된 장경판전(藏經板殿)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내가 해인사를 처음 찾은 때는 1984년 회사에서 일본으로 연수를 떠나기 2달전인 4월이었다.

그 후 2006년에 아내와 함께 다시 찾았을 때는 마침 팔만대장경판 이운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선원사에 보관 돼 있던 대장경판을 조선시대 태조 7년 외침(外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해인사에 이운했던 걸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전무후무한 가장 큰 행사였다.

 

당시 해인초등학교에서 출발하여 대장경판 보관소인 수다라장 앞까지의 행렬을 카메라에 담아 홍보국에 보시한 인연으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봄, 가을에 열리는 행사(정대불사와 무생계 수계법회)의 촬영과, 국내 최고(最古)의 쌍둥이 목조비로자나불을 모신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2007. 11. 24. 노무현 대통령 참석) 때에도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등 국보 3점, 보물 제264호 합천 해인사 등 20점, 사적 제504호 합천 해인사 등 사적 4점이 있는 해인사는 경내 자체가 성보문화재 박물관이라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문화재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오늘은 위의 문화재중 가야산 중봉(해발 1,000여미터)에 위치한 보물 제 222호인 마애여래입상(이하 마애불로 칭함)을 답사하러 나셨다.

 

마애불은 해인사 스님들만의 기도처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일체 금하다가 2013년 대장경 세계문화축전 기간인 9월 21일부터 11월10일까지 1,200여년만에 45일간 마애불을 한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처음 공개됐다.

그 후 다시 일반인들의 출입을 차단하다가 매달 첫 번째 토요일에 마애불 친견 기도 범회를, 매년 음력 3월3일(삼진날)과 9월9일(중양절)엔 헌공다례식을 열고 있어 요즘은 일반인들도 일정만 맞으면 친견할 수 있다.

 

가야산(1,430m) 중봉(1,000m)에 위치한 마애불을 답사하기 위해 해인사 일주문의 왼쪽으로 돌아 선림원 후문에서 출발한 마애불 답사길은 조릿대가 양쪽에 널리 퍼져 자라고 있다.

 

신우대 또는 산죽(山竹)라고도 불리는 조릿대는 1~2미터의 키에 5미리 정도의 굵기로 한방에선 약명으로 죽엽(竹葉)이라 하여 지혈, 해열, 이뇨작용, 항염증에 도움을 주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산중에 자생하는 풀이나 나무등이 거의가 약으로 쓰일 만큼 이로운 것들이나 조릿대만큼 널리 쓰이는 것도 드믈다 보니 옛날엔 이런 산중에서 사부대중들이 긴요하게 이용했을 것 같다.

 

걷다 보니 <반달가슴곰 출현주의> 라고 씌인 현수막이 걸려 있는 걸로 보아 산중이 깊은 것 같다. 계곡의 물소리와 산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시작된 산행의 초입길은 순탄 했다.

허나 30여분을 걸은 후 넓은 계곡을 건너 시작되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되어 있어 길 차체가 없어져 나무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기도 가파른데 당시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해 수십번이나 오르내렸을 석공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숙연해 진다.

도착 후 시계를 보니 50여분 걸린 것 같다. 일주문에서 약 2.7km의 거리다.

 

마애불은 가야산 상봉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평평한 평지위에 가야산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다.

자연 암벽을 이용해 돋을새김으로 조성된 마애불 입상은 전체높이 750cm 몸길이 580cm 넓이 310cm로 조성 시기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 28호)의 가슴 매듭의 유사성으로 추정해 볼 때 통일 신라시대인 9세기경이라고 안내판에 씌여 있다.

 

나는 마애불을 볼 때 사람을 만날 때와 같이 가장 먼저 상호를 본다.

첫 인상은 약간의 미소를 띤 근엄한 분위기가 당당한 리더를 보는 것 같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肉髻)는 크고 높다. 얼굴은 통통하고 언뜻 보면 미소년처럼 보이기도 하고 대장부처럼 보이기도 하며, 이마는 좁고 귀는 길며 인중은 짧고, 입술은 작고 두툼하다.

 

목의 삼도(三道)는 뚜렷하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통통한 얼굴과 더불어 자신만만한 자세이다. 두꺼운 법의에 싸였지만 비교적 신체감이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손을 잘 처리하여 생동감이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면서 외장(外掌)하였고, 왼손은 배에 대어 손등을 보이고 있다. 무늬가 없는 두광(頭光)은 크게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었고 신광(身光)은 새겨지지는 않았으나 빗물이 앞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양옆으로 길게 판 홈이 신광처럼 보인다.

 

가슴을 넓게 드러낸 법의는 U자형으로 주름을 이루며 발등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맨 아랫부분에는 두 발을 따로 만들어 끼우기 위한 둥근 홈이 나 있는데 발부분은 홈에서 밖으로 빠져 나와 있다.

 

헌데 왜 최근까지 마애불 공개를 하지 않았을까?

이 마애불이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것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 같은 가람 구조를 가진 합천 해인사와 관련된 상징성 때문이었다.

해인사의 가람배치도를 보면 일주문에서 수미정상탑(須彌頂上塔)까지 배 모양이다. 일주문이 선수(船首)라면 맨 뒤에 있는 수미정상탑은 돛대처럼 보인다.

이 돛대의 일화는 이렇다.

장경판전 뒤엔 원래 돛대바위가 있었는데 1926년 대적광전 앞 축대를 쌓기 위해 이 바위를 깨어 사용하여 없어져 바위의 넋을 달래고 다시 돛대를 세우기 위해 1986년에 일타(日)스님이 돛대바위 무게 만큼의 탑을 세워 60년만에 다시 돛대의 역할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 탑을 보니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탑(국보 제 84호)과 비슷하다.

따라서 지금 친견하고 있는 마애불은 반야용선(般若龍船)에 중생들을 태우고 해인(海印)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도사공(都沙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두 분의 비구니 스님과 수녀 한분이 동행하여 오르시며 “마애부처님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물으신다.

“이제 20여분만 더 올라 가시면 됩니다” 라고 대답하고 올라가시는 세 분의 뒷모습을 보니 종교의 교류를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부처님의 말씀이나 하느님의 말씀이나 다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생전에 절에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님께서 천주교에 다니는 아들을 이해 하시어 항상 하셨던 말씀이 떠 올라 가슴이 울컥해져 온다.

내가 마애불을 답사하러 다니는 것도 난 마애불에서 어머님을 만나기 위함이 아닐런지..

오늘 따라 십 수년전에 소천하신 어머님이 더 그리워진다.

나훈아의 노래 ‘홍씨’를 읊어보면서 산을 내려와 대적광전에서 삼배를 올리고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다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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